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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쌀 직불금 파동과 개인정보의 보호 / 정병호

등록 2008-11-27 19:39

정병호  서울시립대 법학부 교수
정병호 서울시립대 법학부 교수
기고
쌀 직불금 불법수령자 명단을 국정조사 특위에 제출하는 문제를 두고 벌어지고 있는 일은 현 집권세력의 국정 수행능력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치인, 공직자, 변호사, 의사 할 것 없이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분들이 다수 연루된 것으로 전해져 충격을 준 쌀 직불금 불법수령 사태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국회에 국정조사 특위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정형근 이사장이 개인정보 보호를 내세워 불법수령자 명단 제출을 단호히 거부하자, 특위는 한참 동안 공전하였다. 그런데 그가 그제 갑자기 감사원에 자료를 제출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처럼 손바닥 뒤집듯 쉽게 결정이 바뀌는 것을 보는 국민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럴 거면 애초에 뭐 하러 버티면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는가 말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현실에,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만 가중시켰을 법하다. 아무튼 늦게나마 쌀 직불금 불법수령 사태 진상조사의 토대가 마련되어 다행이다. 하지만 그간의 우여곡절 속에 드러난 우리의 ‘법치 행정’의 현주소에 대해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정형근 이사장은 자신의 “소신에는 반하지만, 여야가 농촌을 살리고 국민을 위하는 차원에서 요청한 만큼 감사원에 원자료를 전달하겠다”고 했다. 불과 5시간 전까지만 해도 법원의 판결까지 근거로 제시하며 특위에 자료 제출을 완강히 거부하던 그였다. 그러던 그가 그럴싸한(?) 이유를 대면서 선심 쓰듯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소신에 반하는’ 결정을 하도록 한 보이지 않는 손은 무엇일까? 아마 정권 핵심부일 것이다. 애초에 그가 완강히 거부한 것도 그 의중이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중요한 국정 현안에 대해 책임자들이 국민의 여론을 바탕으로 진지한 논의와 토론을 거쳐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정권의 실세들이 밀실에 모여 정치적 이해타산을 따지며 결정하던 구태가 재현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미 북한 정책 변경, 미국산 쇠고기 재수입, 종부세 개정, 근현대사 교과서 개정 등 수많은 의제에서 과거의 권위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 현 정권에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형근 이사장의 말대로 ‘국민을 위하는 차원에서’라면, 공단이 보유하고 있는 개인정보를 감사원에 제공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까? 작년에도 제공했는데, 올해 다시 제공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적법 절차를 따른 것인지 의문이다. ‘공공기관의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공단이 감사원에 개인정보를 제공했을 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당시 법률은 “다른 법률에서 정하는 소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개인정보를 “이용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공단과 같은 개인정보 보유기관이 다른 기관에 제공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조항은 그 직후인 작년 5월17일에 개정되어 개인정보를 그 “보유 목적 외의 목적으로 이용하게 하거나 제공하지 아니 하면 다른 법률에서 정하는 소관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에, 그것도 “공공기관 개인정보보호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상당히 엄격한 기준과 절차를 마련한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심의위원회의 심의 없이 명단을 제공하는 것은 위법 아닌가? 작년에 만든 명단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틈만 나면 법질서 확립을 외치는 보수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정병호 서울시립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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