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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반대한민국’ 역사인식의 횡포 / 정태헌

등록 2008-11-28 19:27

정태헌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정태헌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시론
서울시교육청이 서울시내 고교생을 대상으로 극우 인사들을 강사로 초빙하여 ‘현대사 특강’을 진행한다고 한다. 식민사관을 수용하는 사화과학자나 무력통일을 주장하는 인사 등이 강사진의 주요 후보들이다. 얼마 전에는 대통령부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심지어 기업인 조직인 상공회의소까지 나서 ‘좌편향’된 현행 고교 근현대사 교과서를 고쳐야 한다고 온 난리였다. 심지어 한 의원은 국정감사장에서 북한 교과서를 베꼈다는 사실무근의 망언까지 내뱉었다. 하여간 모두가 ‘좌빨’이라는 것이었다.

보수층 집결을 노린 이벤트인지, 권력을 쥔 이들이 왜 이런 정치선동을 계속 벌이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용두사미에 불과했다. 지엽적인 수정에 머문 수정요구안을 보니 현행 교과서가 문제가 없다고 한 이전의 교육부 평가가 결국 틀리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난에 힘든 일반 국민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하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차이를 가르는 기준은 사실 모호하다.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을 색깔론으로 덮어 공격할 때 이 용어는 어쨌건 수십년 동안 활용되어 왔다. 한나라당이나 이명박 정부가 신자유주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이전 정부를 좌파라 이른다. 상대가 좌파니 자신들이 보수우익이라는 것이지만 문제는 채워야 할 보수의 내용이 빈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진실로 보수가 숙고해야 할 대목이 있다. 보수라 할 때에는 당연히 지켜야 할 무엇이 있다. 대한민국이다. 식민지 지배와 달리 국가라는 언덕이 있어 자율적으로 부를 만들고 민주주의 내용을 채워갈 수 있었다. 보수는 그러한 국가에서 진정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강부자’의 이익만 지키겠다는 소아적 사고로는 다른 구성원에게 설득력이 떨어진다. 결국 강부자의 이익을 낼 수 있는 ‘풀’을 없애는 우를 범한다.

경제주체가 개인, 기업, 정부(국가)로 구성된다는 것은 경제학에서 기초 개념에 속한다. 일제 지배하의 경제는 일본인과 일본 자본, 일본 제국주의가 주체가 된, 즉 한국인의 국가가 없는 식민지 자본주의였다. 그냥 자본주의가 아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을 대표하거나 한국인에게 책임지는 존재가 아니라 일본 국왕과 정부에 책임을 지는 식민통치의 주체였다. 보편적 의미의 국가가 결코 아니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겨 사람들이 죽고 빼앗기고 동원되어 끌려가야 했던 식민지 지배 상황을 근대문명으로 보는 역사인식에서는 나라를 되찾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런 역사인식의 소유자들이 대한민국과 그 정통성을 거론하면서 ‘좌빨’ 선동을 하고 있다. 보수가 여기에 합세하는 기막힌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가 위기에 놓여 있을 때 도대체 어떤 정신으로 구성원들에게 이 공동체를 지키자고 할 것인가?

역사는 밝은 면, 어두운 면을 다 보는 과정을 통해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성숙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정체성도 정착되었다. 산업화 없는 민주화, 민주화 없는 산업화는 성립할 수도, 성립된 적도 없다. 한국이 세계에서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면 두 가지를 모두 성취했기 때문이다. 진정 보수라면 이 둘을 아우르는 자기 이념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의 보수는 반북논리 외에 내용이 취약하다. 그토록 부정하는 북한 교과서와 다를 바 없어지고 학생들도 바보가 아니어서 오히려 역효과만 낼 뿐이건만 우리 교과서는 하여간 이승만 대통령 만세, 박정희 대통령 만세 식으로 서술해야 대한민국 정통성이 부각된다고 생각한다. 반세기 전의 마인드를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의 문제는 수십년 전 버전으로 변화되고 성숙해진 세상을 나 홀로 거부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정태헌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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