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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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 무기가 발달하기 이전의 전투에서는 성문을 닫고 버티는 농성전이 때때로 위력을 발휘했다. 전력에서 상대보다 밀릴 때는 정면으로 맞붙기보다는 성을 지키는 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유명한 농성전은 고구려 때의 안시성 전투와 조선시대의 행주산성과 남한산성 전투 등이 대표적이다. 안시성은 성주인 양만춘의 지휘 아래 645년 6월부터 9월까지 당 태종이 이끄는 10만 대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전라도 관찰사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에 들어가 1만명의 병사로 3만명의 왜병을 물리쳤다. 남한산성에서는 패배했다. 청나라의 침략을 받은 인조는 1646년 12월 급하게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45일 만에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농성전에서 일차적인 변수는 구원군이다. 성안의 식량과 병사들의 사기도 중요하지만, 외부의 지원군이 제때 오느냐가 승패에 결정적이다. 수만개의 화살을 배에 싣고 왜군의 후방에 나타났던 경기수사 이빈이 없었다면 행주산성 전투의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안시성 전투에서는 혹독한 추위가 사실상의 지원군이었다. 반면 남한산성 전투에서는 제대로 된 지원군이 없었다. 수백명의 군사가 지방에서 오기는 했지만, 20만명의 청군에게는 새 발의 피였다.
와이티엔(YTN)의 구본홍 사장이 11월25일 밤 사장실에 들어간 뒤 일주일 가량 퇴근도 하지 않고 ‘농성’을 벌였다. 스스로 농성에 들어갔으니 사원들과의 싸움에서 수세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그저께 “볼일 보러” 잠깐 성에서 나왔다가 노조원들의 저지로 ‘농성’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모셨던 이명박 대통령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통령인들 출퇴근도 못 하는 사장을 구할 수 있을까?
김종철 논설위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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