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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시대착오적 정통론 / 김창석

등록 2008-12-02 21:06

김창석  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김창석 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기고
서울시 교육청이 고등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현대사 특강을 벌이고 있다. 필자가 고등학생이던 1980년대 초에 대도시마다 세워졌던 반공회관과 그곳을 견학하면서 듣던 반공 강연이 연상되어, 지금이 과연 21세기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이렇게 역사를 거스르는 행태의 밑바탕에는 ‘정통론’이라는 역사인식의 병폐가 자리잡고 있다.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비난을 본격화하면서 정부 쪽에서 내세운 명분이 바로 ‘대한민국의 정통성’ 수호였고, 대통령도 이를 언급한 바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정통의 국가인 남한보다 북한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썼다는 것이다.

‘정통’은 ‘이단’과 반대되는 말이다. 이를 신봉하는 이들에게 정통은 선하고 순수한 것이며, 이단은 사이비 가짜이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비정상적인 것이므로 없애버려야 할 악이다. 우리는 이런 이분법적 논의를 일찍이 신라 말 교종과 선종 그리고 조선시기 사림파와 관학파 유학자들의 대립에서 경험한 적이 있다.

정통과 이단을 준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 세력과 주장의 흐름을 계보화한다. 본류와 지류, 줄기와 곁가지를 구분하고, 후계자 혹은 정통을 잇는 후계 국가를 중시한다. 역사 서술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정통론 사학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 역사의 정통의 흐름은 ‘기자조선-마한-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진다. 단군과 위씨조선의 역사는 외면했고, 고구려·백제·발해는 빼버리거나 부록으로 처리했다. 정통론의 미망에 사로잡힌 명분론자들은 기자조선이라는 허구의 국가까지 내세우고, 그 흐름을 계승한 국가군을 자기들의 기준에 맞춰 만들어냈다.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인식은 이미 조선 후기에 비판에 직면했다.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정통과 비정통의 이분법을 벗어나 삼한과 삼국을 각기 대등하게 다뤘다. 또 발해도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국가로서 우리 역사로 당당히 편입시켰다. 신채호는 정통론이란 “어리석은 선비들의 완고한 꿈이며, 노예의 헛소리”라고 비판했다. 우리가 고조선을 우리 역사의 서막으로, 삼국을 건국 순서에 따라 고구려·백제·신라의 차례로 배우고, 남북국 시기라 하여 발해를 통일신라와 대등하게 인식하게 된 것도 정통론을 극복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혹자는 남북한이 현재 분단 상태이고 적대 관계를 청산하지 못했으므로 어떤 정권이 정통의 계승자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직 유효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남북한 정부 수립의 주도자들이 과연 당시에 대표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는지, 민주적 절차를 통해 국민들의 동의를 획득한 정권인지, 두 정부가 이후 역사적 과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 해결을 위해 진정으로 노력해왔는지를 가지고 따져야 할 권력의 정당성의 문제이지, 정통성 계승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선언에 있지 않다. 상해 임정으로 대표되는 독립 투쟁의 정신을 잃지 않고, 광복 이후에도 이를 되살려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민주정부를 수립했으며, 온갖 정치·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이나마 경제성장을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북한의 역사도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역경과 그 속에서 이룩한 성과, 그리고 과오를 냉정하게 서술하면 되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정통론을 들먹이고 나아가 이를 가지고 역사교과서의 수정까지 거론하는 것은 100년 전 선배 학자들이 이룩한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일이고, 100년 후 남북한의 역사를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기처럼 동등하게 배울 우리 후손들이 비웃을 부끄러운 일이다.


김창석 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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