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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누드 닭’을 먹은 이야기 / 손철주

등록 2008-12-05 19:04

손철주/학고재 주간
손철주/학고재 주간
삶의창
그날 요리는 ‘누드 닭’이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다. 일행은 호기심이 부풀었다. 요리가 나올 동안 화제는 각국의 ‘털 없는 닭’으로 쏠렸다. 이스라엘 과학자들이 선보인 닭은 웬만큼 알려진 뉴스다. 수년 전 그들은 깃털 없는 닭을 잡종교배로 만들었다. 이 누드 닭은 볼품없는 꼬락서니다. 옷은 홀라당 벗은 채 머리에 관을 쓴 벼슬아치처럼 민망하다. 대신 더위를 이기는 힘이 강하다. 도축이 간편한 것도 장점이다. <뉴욕 타임스>는 이스라엘의 누드 닭을 그해의 아이디어 상품으로 꼽았다.

18세기 중국의 누드 닭은 동물 학대의 표본이다. 청나라 사람들은 전염병 방지와 속성 사육을 위해 닭의 털을 생짜로 뽑았다. 텔레비전에서 봤다며 누군가 한국판 누드 닭 이야기를 꺼냈다. 좌중은 박장대소했다. 토끼와 닭을 한곳에 가둬놓고 길렀더니 멀쩡하던 닭의 깃털이 빠져버렸다는, 설화 같은 실화다. 알고 보니 주범은 토끼였다. 동종끼리 교제할 기회를 빼앗긴 토끼는 원기를 주체하지 못해 밤마다 닭을 덮쳤다. ‘꿩 대신 닭’으로 그 짓을 한 것이다. 토끼는 닭의 의사를 묻지 않았고, 닭은 팔자에 없는 토끼 노릇이 힘겨웠다. 닭이 스트레스로 인한 원형 탈모증에 걸린 사례라는 둥 우스갯소리가 밥상머리를 왁자글하게 만들 즈음, 기다리던 요리가 나왔다.

우리가 시식할 누드 닭은 연원이 모호하다. 유전학적인 변태 닭은 아니며, 그렇다고 성폭행을 당한 닭도 아니다. 참고가 될 문헌이 희박하다. <산림경제>나 <임원경제지>는 다루지 않았고, <규곤시의방>과 <규합총서>를 뒤져봐도 기록이 없다. 우리는 이 누드 닭을 특정 지역에서 알음알음으로 구전된 보양식으로 추정했다. 식재료는 시골 마당에서 뛰어다니는 뻔한 토종닭이다. 닭에게 먹이는 사료가 열쇠다. 뱀을 먹이는데, 산 채로는 닭이 꺼려 할 테니 죽인 뒤에 먹인다. 죽은 뱀은 얼마 지나면 몸에 유충이 슨다. 닭이 그걸 쪼아 먹는다. 신통한 건지 가여운 건지, 그때부터 닭은 털이 빠지기 시작한다. 누드 닭이 되는 이유에 대해 생화학적 추론을 해볼 깜냥이 나에게는 없다. 아무튼 스타일이 흉해도 누드 닭은 힘이 세진다. 깃털 없이 날아다닌다는 목격담도 있다. 일행이 미덥지 못하다는 눈치를 보이자 그날 조리를 주선한 분이 쏘아붙였다. “이거, 생김새만 닭이지 노는 짓은 독수리거든?”

아닌 게 아니라, 긴 시간 고아내도 육질이 무르지 않다. 씹는 느낌이 질기다. 육수를 뒤적이니 산삼과 황기와 음나무 같은 한약재도 보인다. 요리 방식이야 닭백숙이나 삼계탕과 다를 바 없지만 건더기는 문헌과 족보에 없는 신비의 닭이다. ‘독수리가 되고픈 닭’이라는데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는가. 처음 먹는데도 하나같이 저어함이 없다. 좋다는 보양식이라면 두루 맛본, 우리처럼 시시껄렁한 중늙은이들이 그렇다. 다만 보신탕 먹고 개소리 지껄이는 축들과 다른 점은 개숫물 마시고도 먹물 트림을 할 줄 안다는 것. 음식 낯가림이 전혀 없는 예순 초입의 좌장이 시식 소감을 이렇게 정리했다. “이런 걸 전설의 맛이라 하지. 민담을 우려내고 미신을 버무려 푹 고은 맛!”

‘뱀 먹고 털 빠진 닭’ 이야기는 술자리의 안줏거리가 됐다. 모르는 이들이 궁금해한 것은 한 가지. 먹으면 무슨 효험이 있느냐는 것이다. 청춘을 불러내는 보양식은 없다. 푸른 버들이 천 만 가닥인들 가는 춘풍 매어두겠는가. 먹고픈 닭 요리가 하나 남았다. 당나라 시인 이하의 닭이다. ‘장닭 한번 큰 울음에 천하가 밝는구나’(雄鷄一聲天下白) 새벽 온 뒤 모가지 비틀린 닭보다 이 장닭이 훨씬 맛있겠다.

손철주/학고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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