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훈 시민경제사회연구소 기획위원
시론
정부의 애초 감세안에서는 감세 규모가 14조원이었으나, 국회 기획재정위의 정부 감세안 심사 결과 감세액이 애초 안보다 오히려 2조2천억원 가량 늘어날 전망이라고 한다. 민주당은 그동안 줄곧 한나라당의 부자 감세안을 비판했으며, 지난 4일 민생민주국민회의가 주최한 연석회의에서 정세균 대표가 부자 감세안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공언까지 한 터라 이런 결과에 국민들은 또 한번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민주당이 ‘감세 대 감세’ 구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부가가치세 3%포인트 감세를 주장하며 정부 여당은 부자 감세인 반면 자신들은 중산층과 서민 감세안이라고 차별화하였다. 국회 내에서 대부분의 현안은 여야의 타협으로 결정된다. 그렇다면 ‘감세 대 감세’ 구도가 형성된 상황에서는 여야가 각자의 감세안을 주고받는 식의 타협이 이루어지므로, 결과적으로 여당의 감세안에 민주당의 감세안이 더해져 전체적인 감세규모는 오히려 커질 수밖에 없다. 민주당이 한나라당의 ‘부자 감세’를 막으려면 ‘감세 대 감세’로 맞설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의 감세안이 초래할 재앙적 결과에 대하여 집중 공격하고 ‘부자 증세’로 맞서거나 적어도 ‘감세 반대’에서 그쳤어야 한다.
정부 여당의 감세 논리는, 감세는 투자와 소비를 촉진하고 그 결과 경기가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세할 경우 투자와 소비가 늘어난다는 것은 일종의 가설에 불과하다. 이 가설이 현실화할 것인지 여부는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 선진국에서 감세정책이 전면화된 경우는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였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전면적인 감세정책을 단행하였다. 감세 결과 재정수입이 감소했음에도, 재정지출은 오히려 늘어나 재정적자가 확대되었으며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대규모 국채를 발행하게 되었다. 국채 발행은 이자율을 상승시키고 민간부문의 투자를 위축시키는 이른바 구축효과(crowding-out)를 가져왔다. 감세 결과, 부유층의 소득이 늘어났지만, 투자는 오히려 위축되어 실물경제의 경쟁력 상실로 이어졌고 이는 경상수지 적자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대규모 쌍둥이 적자 구조(경상적자 + 재정적자)가 고착화되어 80년대 후반 미국 경제를 암흑기로 몰아갔다.
이러한 선진국의 역사적 경험을 도외시한 채 지금 정부는 대규모 감세와 건설 위주 재정지출 확대로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감세는 지나치게 부유층과 대기업에 혜택이 집중되고 있다. 부유층은 소비성향이 매우 낮으며 소비를 하더라도 고급 외제품을 많이 소비한다. 이는 부유층의 소득 증대가 내수 활성화에 미치는 효과가 매우 제한적임을 뜻한다. 감세 혜택이 집중되는 대기업은 현금을 쌓아놓고도 투자를 잘 하지 않고 있다. 이는 대기업의 감세가 투자 확대로 이어지기 어려움을 뜻한다.
지금 같은 경기불황기에는 감세로 부자 지갑을 채워주는 대신 소비성향이 높은 서민과 중산층의 주머니를 채워야 내수가 활성화될 수 있다. 감세를 포기하고 건설예산을 줄인다면 대학생의 등록금 걱정을 대폭 줄일 수 있으며, 공공보육시설을 대폭 확충하고 아동수당을 도입하여 자녀양육에 따른 서민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또한 서민들의 복지와 관련된 사회적 일자리를 대거 창출하여 고용률을 높일 수도 있다.
지금 시민사회단체는 민주당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을 어렵게 붙들고 있다. 오랜만에 형성된 야당과 시민사회단체의 연대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면 이번 예산안 심사에서 민주당이 야당다운 야당의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윤종훈 시민경제사회연구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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