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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시험을 치르지 않을 헌법적 권리 / 박경신

등록 2008-12-18 20:01

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기고
최근 전국수준 학업성취평가(일제고사)에 학생들이 응시하지 않도록 허용했다는 이유로 담당 교사들이 해임·파면돼 논란이 일고 있다. 하지만 이 논란의 당사자들은 기본적으로 교육권의 주체가 학생임을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징계당한 교사들은 ‘일제고사 거부 교사’들이 아니다. 일제고사를 거부한 것은 학생이며 교사들은 이 학생들이 억지로 시험을 보도록 강제하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는 학생들이 일제고사를 거부할 권리가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할 권리가 있다면 이를 침해하지 않은 교사는 상을 줘야지 징계를 할 수는 없다.

학생의 교육권이 헌법적으로 독특한 점은 교육자의 방침에 따라 교육 수용자(학생)의 권리가 일정하게 제약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공부하기 싫더라도 일정한 ‘강요’를 통해 조금씩 재미를 들이도록 하여 나중에는 큰 보람을 느끼도록 하는 것은 올바른 교육방법이다. 하지만 강요의 도구는 교육적이어야 한다. 곧 공부를 잘 못하거나 열심히 안 하는 학생은 평점을 낮게 주거나 다음 단계의 교육과정으로 진급시키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징계 또는 과태료 등의 강제수단을 동원할 수는 없다.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주거나 다른 학생의 교육을 방해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시험도 마찬가지다. 시험은 보통 학생이 한 단계의 교과과정을 충실히 이수하여 다음 단계의 교과과정으로 이행할 준비가 되었는지, 또는 그 학생이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 학력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절차다. 학생 본인이 진급이나 학력평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해 부모의 동의를 얻어 그 시험을 일부러 보지 않는다고 해서 교육당국이 그 부모나 학생을 징계할 수는 없다. 단지 그 시험을 영점 처리하면 될 일이다. 시험을 보고 틀린 개수대로 학생들을 때리던 과거의 교육은 명백히 잘못된 것임을, 우리는 몸서리치며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학생이 부모의 동의를 얻어 ‘일제고사’를 보지 않겠다는 것은 학생의 헌법적인 권리였으며, 교사들은 학생의 헌법적 권리를 존중해줄 의무가 있었고, 그러한 의무를 이행한 교사들을 징계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었다. 특히 이번 ‘일제고사’는 다른 시험과 달리 순전히 교육당국이 각 학생 및 학교의 성취도를 전국적으로 판단해 보고 교육시스템의 효율성을 자체평가하기 위해 진행했던 것이다. 순전히 교육당국의 정보수집 활동으로 학생의 교육권 보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그런 시험은 학생들이 더욱더 거부할 권리가 있다. 미국의 몇몇 주들은 주 단위 졸업시험을 보지만 어떤 학생도 이 시험을 볼 의무는 없으며, 어떤 교사도 학생들이 빠짐없이 이 시험을 보도록 하지 않았다고 하여 징계당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이와 같은 자신의 권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교육당국과 학교가 위계와 강압으로 시험응시를 강요하고 있었고, 일부 교사들이 그 학생들이나 그 부모들에게 학생들의 권리를 고지해 준 것 이라면 교사들은 공익적인 내부 고발자라고도 할 수 있다.

학생은 자신의 전국 석차를 알지 않을 권리가 있다. 치기 싫은 시험을 침으로써 다른 학생들이 자신들의 전국 석차를 알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할 의무도 없다. 이번 일제고사는 교육시스템의 점검 및 학교간 성적 비교 등 순전히 교육당국의 행정적 필요로 수행된 것이다. 학생은 이에 동원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징계를 당한 교사들은 학생들의 권리를 보호하려 했던 것이므로 이들 교사들에 대한 징계는 위헌이다.

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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