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농민을 존경하는 사회로 / 김종철

등록 2009-01-09 19:21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삶의창
대학을 그만두기 전 몇 해 동안 나는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학기 중에 꼭 농촌체험을 해 보도록 권장했다. 영문학 시간에 농촌을 다녀오라고 하니 학생들은 어리둥절해했지만, 나는 문학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농촌체험이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학생들은 도리 없이 내 권유를 받아들여 며칠씩 농사일을 거들고 돌아왔다. 물론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내켜 하지 않는 학생들은 예외였다.

나는 인근 농촌마을들에 연락하여 협력을 구했고, 수십 명의 학생들은 몇 명씩 나누어 농가에서 며칠 동안 먹고 자면서, 일하다가 돌아왔다. 농민들은 농사일을 돕기는커녕 망쳐놓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쓸쓸한 마을에 젊은이들이 온다니까 반갑게 맞아주었다. 시골에서 돌아온 학생들은 대개 많은 것을 느꼈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중에는 농촌의 실상을 처음 경험하고 몹시 마음 아파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예전에 우리 대학생들에게는 농활이라는 관습이 있었다. 아마 식민지 시대부터 시작되었던 이 관습은 한국이 산업국가로 부상하면서 점차 사라져, 오늘날에는 극소수 외에 농활에 관심이 있는 학생은 없다. 그러나 실은,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농촌체험이 대학생들에게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래 인간의 진정한 행복에는 육체적인 노동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예로부터 선각자들이 늘 말해 왔고, 우리들 각자의 체험에 비춰보아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그리고, 이른바 지식인이라고 하면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토대 중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농촌과 농민의 구체적인 현실을 모르고 평생을 지낸다는 것은, 한마디로, 죄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무지와 무관심이 결국은 이 사회의 온갖 불행과 재앙의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더 화급한 현실 문제가 있다. 그것은 온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농업 붕괴라는 위기 현상이다. 물론 최근의 국제 곡물시세의 급격한 등락은 금융자본의 투기 현상에 의한 것이었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투기와 관계없이 지금 세계의 농업이 벼랑 끝에 놓여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수십 년 동안 산업영농과 농산물 시장 완전 개방을 강요해 온 ‘자유무역’ 논리로 세계 전역에서 토지가 급속히 사막화하고 있고, 기후변화로 작물 생육 환경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당장에 돈이 된다면 장기적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아랑곳하지 않는 이 시대의 고질적인 병리 현상이 결국 인간 생존의 궁극적 토대인 농사마저 이토록 망쳐놓은 것이다.

지금이라도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면 땅과 흙을 살리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농사라고 해서 다 농사가 아니다. 땅과 흙을 잘 보살필 수 있는 사람, 즉 소농과 그들의 공동체만이 지속적인 농사를 할 수 있다. 흙은 만물을 기르는 어머니지만, 정성스럽게 보살피지 않으면 결국 죽어버리는 연약한 생명이다. 인류 사회는 이 생명을 지키는 데 평생을 바치는 농민과 그들의 공동체 덕분에 장구한 기간 인간다운 문화를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조만간 1990년대 이후 이북이 겪어온 것과 같은 극심한 기아 상황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삶의 원점으로 돌아가 무엇이 정말 중요한 가치인지 겸허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이북과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여 유기농 체제로 전면적인 전환을 함으로써 파국을 면한 쿠바의 경우는 소중한 선례가 된다. 건강한 사회란 농민을 존경하는 사회이다. 지금 쿠바에서 농민의 수입은 대학교수보다 훨씬 많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