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유레카
1917년 12월6일 아침, 프랑스 화물선 몽블랑호가 2500톤이 넘는 폭발물을 싣고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핼리팩스항을 빠져나가다가 다른 배와 부딪혔다. 승무원들은 불을 끄려다 금세 포기하고 구명정을 타고 피했다. 몽블랑호는 항구 안으로 흘러들어와 부두에 부닥쳤고 불이 옮겨붙었다. 곧 배가 폭발하면서 검은 비와 쇠, 불, 바람이 휘몰아치고 해일이 해안을 집어삼켰다. 무려 1963명이 숨진 대참사였다.(<언싱커블>)
당시 현장에 있던 새뮤얼 헨리 프린스 신부는 이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이 참사를 다룬 <재난과 사회 변화>라는 박사논문을 썼다. 재난에 직면한 인간 행위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첫 연구서다. 그가 발견한 것은 재난 인격(disaster personality)이 예상과 매우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재난에서 사람들은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재난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거부 단계다. 둘째는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숙고 단계다. 셋째는 결단의 순간이다. 가능성을 점검한 뒤 행동에 나서는 단계다.
모든 재난에는 인위적 요소가 들어 있다. 재난을 뜻하는 영어 단어 ‘디자스터’는 라틴어 ‘벗어나다’(dis)와 ‘별’(astrum)이 합쳐진 말이다. 운명의 별이 궤도를 벗어나는 과정에 인간이 개입한다. 몽블랑호 승무원들이 침착하게 불을 껐다면 참사는 없었을 것이다. 지난 20일 서울 용산 재개발 건물에서 경찰의 폭력적 진압으로 철거민·경찰 여섯 명이 숨졌다. ‘작전’은 오전 6시5분에 시작돼 7시 반이 안 돼 끝났다. 끔찍한 인위적 재난이다. 숨진 이들은 기껏해야 둘째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재난은 정적 속에서 생겨난다고 한다. 국민들이 바라보고만 있는 사이에 이명박 정부는 우리 사회 전체를 재난으로 몰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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