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논설위원
아침햇발
한 전직 언론인의 얘기다. 그는 와이에스(YS), 곧 김영삼 전 대통령의 조언자 중 한 사람이었다. 와이에스가 옛 민자당 대표일 때만 해도, 그는 할 말을 다 했다. 만나는 시간 내내 와이에스는 듣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던 와이에스가 여당 대통령 후보가 된 뒤부터 말하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통령 당선 뒤에는 면담 시간의 절반 이상 자기 말만 하더라는 것이다. 1년쯤 지나자, 이제는 그가 할 말이 없어졌다. 대통령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이 안 떨어졌다고 한다. 온갖 정보가 집결되는 현직 대통령의 ‘내공’을 따를 수 없었다는 것이지만, 대통령이 듣는 대신 말하는 데 익숙해졌다는 얘기도 된다. 그런 대통령 앞에서 사람들은 말문을 닫게 된다.
취임 한 돌을 앞둔 이명박 대통령은 더하다고 한다.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의 말이다. 와이에스도 그렇게 할 말이 많아지는데, 스스로 일꾼이라고 자부하는데다 매일 자정 가까이까지 일에 파묻히고 잠꼬대로까지 업무 지시를 한다는 ‘워커홀릭’ 대통령은 오죽하겠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이 대통령은 세세한 대목까지 챙겨 아랫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스타일이다. 제한된 정보를 알게 되기 마련인 비서나 측근들로선, 다 안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에겐 직언을 하기 어렵다. 지금 청와대 안에서도 한두 사람이 가끔 에둘러 이견을 내놓는 정도라고 한다.
청와대 밖의 의견은 이 대통령이 들으려 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됐다. 촛불과 인터넷 등 반대와 비판의 목소리는 기피와 억압의 대상이다. 틀어막는 데만 급급해한다.
여당이라는 한나라당의 건의와 주장조차 묵살되기 일쑤다. 대표 등 당직자들도 의논 상대가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 대상인 듯하다. 이번 개각이 그랬다. 용산 철거민 참사에선 청와대의 ‘진상규명 먼저’ 입장과 달리 ‘문책 먼저’를 주장했던 홍준표 원내대표가 관련 회의에 참석도 못했다. 눈치 빠른 이는 하룻밤 새 말을 바꿨다. 제편의 입까지 닫게 하고, 눈치만 보며 굽실대게 하는 짓이다.
주변의 아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게 되면, 듣는 기능이 퇴화된다. 말리는 사람이 없으니, 부추기는 소리나 강경론만 귀에 들어온다. 민심과 동떨어진 일까지 예사로 하게 된다. 여전히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만 챙기는 인사나, 책임 있는 이를 문책하는 대신 엉뚱한 쪽으로 핑계를 돌리려는 태도 따위가 그런 예다. 그렇게 소통이 막히면 국민의 가슴엔 화만 쌓이고, 같은 편도 외면하게 된다. 여론을 수렴하고 풀어내는 정당과 의회의 기능까지 마비되니, 위기 대처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정권 자신은 물론, 지탱해준 지지세력, 나라까지 위태롭게 된다.
그런 위기를 맞아 혼자 걱정만 하는 이가 지도자일 순 없다. 미국 공화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은 1946년, 나치를 단죄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소급처벌 금지 등 법치주의를 규정한 미국 헌법의 정신에 반한다고 공개 비판했다. 비난이 빗발치고 정치적 손해도 감수해야 했지만, 그는 그런 재판이 헌정체제를 위태롭게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은 <용기있는 사람들>에서, 주목할 것은 그의 주장이 옳은지 여부가 아니라 그의 불굴의 용기라고 말했다.
지금 필요한 것도 그런 용기를 지닌 정치인이다. ‘나라가 이래서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한다면 정치적 이해는 제쳐 둬야 한다. 필요한 때 이리저리 계산만 하다 말을 삼키는 정치지도자가 대통령이 된 일도 없다. 꼽아보면, 지금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도 그리 많지 않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그중 한 사람이다.
여현호 논설위원yeopo@hani.co.kr
여현호 논설위원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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