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우 선임편집기자
한겨레 프리즘
“군주정이나 전제정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데는 많은 성실성이 요구되지 않는다. 군주정에서는 법의 힘이, 전제정에서는 항상 올려져 있는 군주의 팔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억제한다. 그러나 민주정 국가에서는 그 이상의 원동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덕성이다.” 몽테스키외가 1748년 펴낸 <법의 정신>의 한 대목이다.
지난 주말 서울 청계광장의 주인은 경찰이었다. 경찰이 용산 참사 추모대회조차 봉쇄했기 때문이다. 추모대회는 지극히 평화적이었는데도, 경찰은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불법’이라며 해산을 종용했다. 거리행진에 나선 시민들과 인도 쪽 사람들과 이를 취재하던 기자들에게까지 파란물감을 쏘아댔다. 경찰은 한술 더 떠 앞으론 최루탄도 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희생자 추모조차 광장에서 할 수 없는 나라, 대한민국은 공권력이 주인인 나라가 돼 버린 듯하다.
용산 참사에 대한 수사와 대책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출구가 생애를 건 저항말고는 없었다’는 숨막힌 현실에 대한 직시와 뼈아픈 반성에서 시작해야 옳았다. 그러나 검찰은 참극을 부른 사회·경제적 맥락은 외면한 채 경찰 감싸기와 편파수사로 일관했다. “검사는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며, 부여된 권한을 남용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검찰청법 4조 2항은 사문화된 것일까. 희생자에게 모든 책임을 씌운 채 죽음을 부른 과잉진압에 대해선 아무 책임도 묻지 않는 수사 결과를 두고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뢰하고 동의할지 의문이다. 특히 진압 과정에서 최소한의 인명 구조용 안전장치도 마련하지 않은 대목과 물포 쏘는 용역을 경찰이 보호해 준 부분에 대해선 치열한 법정 공방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내놓은 철거민 보상대책 역시 제2, 3의 용산 참사를 예방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번 참사의 주요 원인이었던 상가 세입자의 권리금 갈등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인 해결책도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환 재개발, 개발이익 공유, 대체 상가 마련 등 시민단체와 전문가가 내놓았던 의견들은 어느 것 하나 수용되지 않았다. 철거 과정에서 용역 폭력을 근절할 방안 역시 제시되지 않았다. 이토록 부실한 대책을 내놓으면서 법과 질서만 지키라니, 가난한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겨도 오로지 순종하며 길거리에 나앉으라는 소리인가.
이명박 정부 1년은 자기모순과 꼼수와 역주행으로 점철돼 왔다. 경제를 살려 가난을 구제하겠다더니 가난한 사람들과 싸우고, 가진자들의 특권은 강화시키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는 외면하고 있다. 기업에 대한 규제는 거침없이 풀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은 무자비하게 옥죄고, 작은 정부를 내세우더니 검찰·경찰·국정원 등의 권력기관만 준동하고 있다. ‘떡검’과 ‘견찰’이란 조롱은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보통명사가 되었다.
법의 과잉이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에 대한 스피노자의 지적은 300여년이 지났지만 다시 새겨볼 만하다. “법으로 모든 것을 규제하려는 것은 악덕을 교정하기보다는 야기한다.” 자유를 억압하는 법은 필연적으로 법에 대한 불신과 불복종을 낳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신의를 허물 것이라는 경고다.
이젠 공권력도 권력 입맛에 맞는 것과 국민에게 좋은 것쯤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편의적이고 편파적인 법 운용에 대한 쓴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권력의 칭찬만을 바라는 공권력은 결국 나라의 바탕을 무너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windage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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