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선옥 소설가
기고
스콧 니어링 부부처럼 전원에서의 조용한 삶을 꿈꾸며 시골로 들어간 선배가 있다. 어느 날 그 선배가 조용히 살고 싶어서 들어온 시골에서 조용히 못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마을 근처의 돌 공장에서 주민 동의도 없이, 불법으로 거대한 기계를 들여다놓고 밤낮으로 돌을 깨는 작업을 하는 통에 소음과 먼지로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견디다 못해 대부분이 노인들인 인근 마을 사람들이 공장 앞으로 가서 시위를 했는데, 젊은 사람은 오직 선배밖에 없어 자연스럽게 ‘돌공장 가동저지 투쟁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한다.
선배는 생업을 포기하다시피 하고 공장 앞에서 투쟁하고 군청에 민원을 넣었지만 공장도 군청 공무원들도 요지부동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외지 사람이 와서 노인들을 격려해 주면 힘이 날 것 같다는 선배의 부탁에 지지 방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들은 지쳐 있었다. 경찰도 공장 편에 서서 주민들을 밀어내는 듯했고 공무원도 공장 쪽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때 한 촌로가 말했다. 이 사태를 국가인권위에 제소해야겠다고. 그는 힘없는 주민을 외면하고 돈있는 공장만 편드는 공권력을 한탄했다. 가난한 사람의 인권은 누가 보장하느냐며 그는 인권위를 말했다. 나는 그때 알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제 한 힘없는 촌로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힘있는 국가기관’이 되었구나.
이렇듯 시골 노인의 입에서 ‘인권’이란 말이 스스럼없이 나올 수 있는 배경에는 전적으로 국가인권위원회의 힘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하고 힘없던 이 나라 사람들은 ‘인권’이란 말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살았대도 과언이 아니다. 옛날에 ‘민·관·군’이 아니라 ‘군·관·민’의 시대 때 가난한 민초들이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관리들에게 수모를 당할 때면 ‘그저 없이 사는 게 죄’다, 혹은 ‘못 배운 게 한’이라고 탄식하고 말 뿐이었다. 장애인을 둔 집에서는 그저 팔자소관이려니, 하고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을 포기하고 살았다. 그런 깜깜한 시절을 생각하면, 국가인권위원회가 생긴 이래의 세월은 그야말로 광명 천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부모들이 집안에 ‘금판사’ 하나만 나기를 바라며 허리띠 졸라매며 자식교육 시켰던 이유는 그만큼, ‘관’에 억눌려 산 탓이기도 하다. ‘관’에 억눌린 한이 깊은 ‘민’들에게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관’이 있다는 것은 처음에 놀라운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차츰 인권위원회에 하소연하기 시작했고, 이제 인권위 탄생 8년여를 지나는 동안 시골마을 촌로의 입에서도 거침없이 인권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국가기관으로부터 인권침해를 당해도 어디다 하소연할 곳이 없다. 공권력은 언제나 민이 아니라 관의 편에서 그 힘을 발휘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입에서 ‘법치’라는 말이 자주 들먹여질수록, 그 법은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 아니기 십상이다. 부자나 가난한 이나 똑같이 보호하겠다고 만들어진 법이 그 운용에서는 예의 부자 편을 들고야 만다. 이런 법, 이런 권력 사용에 대해 누가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인가.
경제가 어려울수록, 우리 삶이 힘들수록 인권위의 활동은 더욱 넓혀져야 하며 그 권한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민초들이 서러운 눈물을 덜 흘릴 수 있다. 사정이 그런데도 정부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직을 축소하겠다고 한다. 지방사무소 세 곳도 폐쇄하겠다고 한다. ‘억울한 민들의 민원’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도 그렇다고 한다. 사람을 더 늘려도 부족할 판에 조직을 줄이면 그러잖아도 부자들 편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 정부의 누가 힘없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것인가.
공선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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