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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한 성직자에 대한 이야기가 남긴 것 / 박진규

등록 2009-02-20 20:34

박진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박진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기고
이번 한 주간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으로 슬픔에 잠겨 지냈다. 맹추위 속에서도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는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유지를 따라 장기기증 서약자가 급증했다. 고인을 추모하고 그 뜻을 기리는 데는 종파적 차이나 이념의 색깔도 힘을 쓰지 못했다. 온나라에 가히 ‘신드롬’이라 불릴 만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특히 미디어는 연일 그의 삶을 기리는 기사와 프로그램을 생산해 내고 있다. 워낙 우리 사회의 큰어른으로 존경받던 분인 터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바람의 상당 부분은 미디어의 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 며칠 새 일간지 서너 페이지와 방송 메인 뉴스 네댓 꼭지가 그분과 관련된 이야기들로 채워지고 있다. 영웅 만들기에 능하지 못한 우리 문화에 비추어 볼 때 익숙지 않은 현상이다. 살아생전 그와의 인연을 추억하는 이들의 사연이 지면을 채우고, 그의 온화한 미소와 그가 남긴 소박한 유품의 영상이 화면 가득하다.

그동안 미디어가 종교를 그려내는 방식에 관심을 두고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런 미디어의 모습은 매우 이례적이다. 다종교의 공존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 사회에서 미디어가 특정 종교를 호의적으로 다루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최근 제도권 종교에 대한 비판적 사회 분위기가 확산되는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번에 미디어는 한 종교의 언어·음악·이미지·신학적 세계관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우리는 기사를 통해서, 사진과 영상을 통해서, 망자를 추모하고 그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는 가톨릭 전통에 노출되었고 또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이 현상의 의미는 무엇일까? 누구보다도 사회의 흐름과 사람들의 욕구에 민감한 미디어가 그려내는 이런 모습은 우리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나?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의미를 찾아본다. 그 하나는 우리 사회가 ‘종교’에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제도권 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깊어졌던 것은 종교의 현실과 우리 사회의 기대 사이에 놓인 괴리 때문이었다. 물질적 탐욕에 지배받을 뿐 아니라 세속 권력에 빌붙어 하수인 노릇하는 종교와 종교인의 모습에 사람들이 등을 돌렸던 것이다. 반면, 지금 미디어가 추억하는 위대한 한 성직자의 삶은 무소유, 권력에 대한 당당함, 소외된 자에 대한 극진한 관심과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의 모습이다. 그 성직자의 삶에 타종교인과 비종교인까지 기꺼이 경의와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되사야 할 제도권 종교가 깊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다른 하나는, 21세기를 사는 세속사회가 목말라하는 가치가 ‘종교’라는 이름에 투영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질로만 사람을 움직이는 사회, 실력이라는 기준으로 사람의 서열을 매기는 사회, 어려운 경제상황을 핑계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사치로 치부되는 사회에는 종교가 상징하는 가치들이 결핍되어 있음을 경고한다. 화면과 지면에 비치는 성직자는 물질보다는 사람을 중시하고, 높음보다는 낮음을 추구하고, 성취의 효율보다는 함께함의 덕을 낫게 여기는 삶을 알았고, 죽음으로 그 가치를 강론하고 있다.

사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가치 지향적이다. 그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불편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언론이 추기경에 대하여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며, 또 어떤 이들이 늘어놓는 그와의 인연은 꽤나 아전인수 격이다.

박진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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