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시론
3·1운동 90돌을 맞는다. 지난 90년 동안 올해처럼 3·1운동이 폄하되고 왜곡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독립운동가들이 건국훈장을 반납하겠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은 지하나 망명지에서 이날의 숭고한 뜻을 기렸고 국내의 동포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마음속으로 독립의 꿈을 다졌다. 해방 뒤 혼란기 한때 좌우가 따로 기념식을 하기도 했지만 3·1운동의 거룩한 정신은 다르지 않았다.
3·1운동은 국권을 강탈당한 지 9년 만에 자주독립·공화주의·국민통합·비폭력의 가치를 추구하며 맨주먹으로 일어선 세계사적인 독립운동이었다. 거족적인 항쟁이었다. 그 결과 임시정부의 수립과 국외 무장독립운동을 촉진하고 국내적으로는 민중의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진흥·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일어나고, 납세거부운동·물산장려운동·국산품애용 등 경제적 자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국제적으로는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반영 자주운동, 이집트와 터키의 독립운동 등 피압박 민족 해방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의 가장 중요한 열매는 민주공화제의 헌법(약헌)을 제정하면서 출범한 임시정부였다. 1919년에 수립되어 해방 때까지 27년 동안 일제와 싸운 임시정부는 지역·이념·종교·신분을 뛰어넘어 독립운동의 구심체 구실을 하였다. 좌우가 합작하고 아나키즘 계열도 참여했으며 중국 정부를 설득하여 국군(광복군)을 창설했다. 일제에 선전포고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웠으며 카이로선언에 ‘한국 독립’의 조항을 포함시키는 외교역량을 보였다.
해방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헌법 전문에서 3·1운동 정신을 잇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한다고 천명한 것은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며 국민적 합의였다. 이후 아홉 차례의 개헌 과정에서도 이 내용은 헌법 정신의 불변치가 되고 대한민국 정통성의 탯줄이 되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3·1운동과 임시정부와 헌법 정신이 도전받기 시작했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정권의 이데올로그가 되면서 교과서를 왜곡하고 정부수립일을 건국일(절)로 기념하고 임시정부를 영토와 주권을 갖지 못한 명분상의 존재라고 폄하했다. 마치 일제와 친일신문들이 가정부(假政府)라고 비하했던 것과 같은 연장선상이다. 심지어 몰지각한 부류는 미군정이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라고 참람한 ‘학설’을 내놓는다.
이들에게 3·1운동→임시정부→독립운동→통일운동→민주화운동은 폄훼·말살의 대상이다. 김구는 테러리스트가 되고, 임시정부는 가정부, 4월 혁명은 시위데모,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은 폭동, 촛불집회는 철부지들의 난동이 된다. 3·1운동이 추구했던 공화제의 가치는 ‘민간 파시즘’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입법·사법·행정·지자체·감사원을 한 묶음으로 엮고 국정원·검경·족벌신문을 정권의 홍위병으로 내세우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파문이 보여주듯 외세에 대한 분별없는 추종과 동포에 대한 끊임없는 증오와 적대를 낳고 있으며 남북관계도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비폭력 정신은 실종되어 용산에서 6명을 불태워 죽이고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힘없는 서민들만 법정으로 끌려간다. 3·1운동 때 일제는 수원 제암리에서 교회에 불을 질러 20여명을 죽이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3·1정신은 어떤 이유로도 훼손될 수 없다. 대한민국 건국의 모태이고 앞으로 남북 통일의 공통분모가 될 민족 동질성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3·1정신이 압제와 불의에는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는 저항정신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3·1운동의 거대한 분화구는 휴화산이 아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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