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기자
유레카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온나라를 뜨겁게 달군 ‘금모으기’ 운동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한국인이 어떤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줬다. 그해 1월 초 시작된 금모으기 운동에는 4월까지 무려 351만명이 참가했다. 모두 227톤에 이르는 장롱 속 금을 끄집어내 수출했다.
그러나 그 성과는 실체보다 크게 부풀려졌다. 네 가구에 한 가구꼴로 동참했지만 모은 금은 20억달러어치에 불과했다. 외채 규모를 고려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였다. 금은 금괴 등의 형태로, 헐값에 수출했다. 국내 금·은 세공업체들은 원료 부족으로 대부분 휴·폐업 상태에 처했다. 그 사이에 종합상사들은 10억달러어치의 금을 외상으로 수입해다가 다시 수출해 현찰 달러를 확보하는 데 열을 올렸다.
경제 의병운동으로서 금모으기 운동은 그다지 큰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국민의 열정을 하나로 모으는 정치적 측면에서는 기막히게 성공했다. 그나마도 성공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달러 확보라는 확실한 비전이 있었다. 국민은 금을 싼값에 팔아 약간의 희생을 하는 대신, 나라의 위기 극복에 동참한다는 자부심을 얻었다. 또 그런 희생에 너나 할 것 없이 동참한다는 신명이 있었다.
나라가 또다시 경제위기를 맞았다. 이번에는 임금을 깎아 일자리를 늘리자는 한국판 ‘잡셰어링’ 카드가 새로 나왔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와 같은 국민운동 차원으로 잡 셰어링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 고통은 임금 삭감 형태로 노동자만 떠안는다. 특히 신규 고용시장 진입자와 최저임금 적용자,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에 희생이 쏠린다. 누가 과연 자부심을 갖고 이 운동에 동참할까? 대통령 직무부터 잡 셰어링한다고 해도 감동을 줄 것 같지 않다. 첫단추를 잘못 채운 탓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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