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필화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기고
정부는 한-아세안 정상회의를 6월초 제주에서 연다고 발표했다. 이 정상회의에서 한국은 아세안과 정치·경제적 파트너로서 협조하기 위한 일반적 의제를 논의할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 발전에 필요한 개발원조 계획을 제안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기회에 아시아여성학회에 참여하는 여성학자로서 정책 입안자들에게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은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 제공국으로 전환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에 서구 산업국들이 과거에 개도국 발전 지원을 하며 범했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고 탈권위주의적이고 탈식민주의적인 시각에 입각한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잠재력이 크다. 지원 전달 방법에서도 수혜국의 필요에 따른, 수혜자의 참여를 최대화하는 맞춤식 방안들을 끊임없이 모색할 수 있는 경험을 갖고 있으므로 이를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둘째, 발전 문제에서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여성은 육아·가사 등 보살핌 노동자로서 시장 안팎에서 이중 부담을 갖는다. 전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생태위기, 온난화, 자원고갈, 물부족, 곡물가격 폭등 등은 빈국과 빈곤계층, 특히 여성에게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지진해일·태풍·사이클론 같은 자연재해에서도 여성 인명 피해가 남성보다 서너 배 더 높다. 따라서 환경영향 평가와 성별영향 평가는 미래의 발전 프로젝트에서 빠져서는 안 될 주요 사항이다.
셋째, 여성이 적극적으로 생산에 참여할 수 있을 때 한 나라의 경제 또한 발전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지원은 실질적으로 그 여성들이 보살피고 있는 아이들·노인·환자들에 대한 지원이 된다는 것은 이미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들을 지원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를 새천년발전목표(MDGs)에서 본다면 크게 ‘교육·건강·안전’을 여성들에게 보장해야 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세 가지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여성들에게 제대로 제공되는지의 여부야말로 한 사회의 발전 척도이며 목표 달성의 지표일 것이다.
여성들이 받은 교육, 문해율은 그 사회 발전과 직결된다. 재생산·자급자족 및 살림살이의 주요 주체인 여성의 건강은 사회 전반의 건강을 담보한다. 노동력의 국외 이주로 의료 전문인들이 부국으로 유출되는 현상은 현지 의료 서비스의 질을 낮추고 있다.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 전문인들을 교육하는 현지 훈련기관 지원이 필요하다. 더불어 전통적으로 각종 씨앗 보존자로서 생물종 다양성과 생태계를 보존해 온 여성의 기여도를 인정하고, 농업 생산자인 여성들에게 충분한 지원을 하기 위해서 여성들의 신체와 토착 조건에 따른 적절한 기계의 고안도 필요하다. 또한 여성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서 가정 안팎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적 평등의 안전망을 확보하는 것도 절실하다.
전지구화를 통해 가속화되는 생태계 파괴와 자원전쟁, 빈부격차 심화와 같은 현상은 이제 새로운 대안적 패러다임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효율성과 경쟁력·생산성을 우선적 가치로만 삼는 발전이 아니라 그 사회의 삶의 방식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인간적인 삶의 가치에 대한 질문들을 함께 가져가야 한다. 세계는 무한한 관계망으로 이루어졌으며, 누구도 관계 의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생명의 기본원리다.
일방적인 제공-수혜의 관계가 아닌 타인을 향한 책임과 존경, 상호 호혜적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나눔의 상상력’을 한-아세안 협력 속에서 실천하고 키워가길 바란다.
장필화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장필화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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