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서 이화여대 석좌교수, 초대 대한민국 인권대사
기고
유엔은 아직까지도 인권을 정의하지 않았다. 인권은 인류의 행복과 밀접한 관계이기 때문에 인류가 누리는 삶의 질과 폭에 따라 인권의 내용도 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이런 유엔마저도 20세기까지는 인권을 경제성장의 걸림돌로 여겼다. 성장을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환경 파괴와 인권유린이 불가피하다고 본 것이다. 한때 아시아의 용으로 비유됐던 한국의 개발독재를 제3세계의 모델로 치켜세웠던 시절의 얘기다.
성장 중심의 모델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파산한다. 이후 철저한 분석을 토대로 등장한 21세기 모델이 바로 지속 가능한 발전이다. 이것은 비록 성장 속도가 늦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동시에 보장해야 한다는 모델이다. 이를 계기로 인권, 환경, 평화 등이 인류의 핵심적 가치로 떠올랐다. 말하자면 21세기 발전모델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 모델은 20세기 모델에 대한 뼈저린 반성에서 유래했다. 이제 국제사회는 독재정권의 만행을 공개적으로 규탄하고 환경을 마구잡이로 훼손하는 국가에 대한 경제 제재를 확대하고 있다. 미얀마와 북한이 본보기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프리덤하우스는 해마다 세계 100여국의 자유권 수준을 시민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로 구분해 순위를 매긴다. 7점 척도로 따져서 1∼2점은 자유국가, 3∼4점은 절반 자유국가, 5∼7점은 독재국가로 규정한다. 한국은 10여년 전부터 평균 2점을 얻어 자유국가 등급에 올라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악명을 극복하고 선진국 대열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우리보다 높은 점수를 얻은 국가가 50여국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나온 길보다 갈 길이 더 멀다고 할 것이다.
대한민국 인권대사를 지낸 사람으로서 최근 정부가 국가인권위원회 조직을 21%나 감축한다는 소식에 우려가 앞선다. 유엔에서 국제회의가 열릴 때마다 한국 인권위를 금지옥엽처럼 자랑했던 정부가 돌연 태도를 바꾼 배경을 이해하기 힘들다.
국내의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인권위가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게 여론의 평가다. 인권위가 축소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장애인, 이주민, 여성, 노동자 등 한국 사회의 약자들이 한목소리로 반대 의견을 발표한 사실이 단적인 증거일 듯하다. 해가 갈수록 인권위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도 정부의 역주행과는 사뭇 다른 흐름이다.
국제사회의 반응은 더 예민하다. 한국 인권위를 벤치마킹하며 인권기구 설립을 준비하던 이웃나라 일본의 변호사들이 유엔의 도움을 요청한 것을 시작으로, 국제 인권 엔지오는 물론 한국 인권위가 부의장국을 맡고 있는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까지 유감을 표명했다. 인권위 설립 때부터 인권기구의 독립적 위상을 강조했던 유엔인권최고대표가 1년 사이 두 번이나 한국 정부에 우려를 표한 것도 이례적인 사건이다. 아마도 한국 인권위가 국제조정위원회 차기 의장국으로 유력하다는 점이 국제인권 메커니즘의 관심을 집중시킨 배경일 듯하다.
지금 한국은 중요한 길목에 서 있다. 경제, 환경, 인권, 평화 어느 하나도 뒤로 물릴 수 없는 처지다. 분명한 사실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인권기구를 무리하게 축소할 경우,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서의 위신 하락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선진화를 지향하고 국가브랜드 가치 제고에 주력하는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 정부의 인권위 축소 방침이 철회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박경서 이화여대 석좌교수, 초대 대한민국 인권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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