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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괴물이 돌아온다 / 여현호

등록 2009-04-20 20:48

여현호  논설위원
여현호 논설위원
아침햇발
4·29 재·보궐선거는 참 이상한 선거다. ‘정권 심판’이나 ‘견제’ 따위 구호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정권이 바뀐 지 1년여 만에 치르는 선거라면 중간평가 성격을 띠기 마련이지만, 지금은 그런 의미 부여가 영 어색해졌다. 그리된 데는 검찰 수사가 큰 몫을 했다. 연일 노무현 전 대통령 주변의 비리 의혹이 쏟아지고 노 전 대통령 자신이 곧 검찰에 소환될 판이니, 그 말고 달리 누구를 비판하는 게 사실 맥 빠진 일이 됐다.

선거의 성격이 바뀐 게 꼭 그 때문만은 아니다. 이번 국회의원 재선거는 대결 양상부터 다른 때와 다르다. 여야 다툼은 오히려 뒷전이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치고받고 싸운다. 친박과 친이가 맞붙은 경주가 그렇고, 전주 덕진과 완산갑도 한때의 동지들끼리 싸우는 판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후보 단일화는 제쳐둔 채 경쟁하는 울산북도 마찬가지다.

공통된 열쇳말은 ‘지역’이다. 경주만 해도 대구·경북 지역의 주도권을 건 선거다. 친이든 친박이든 이길 때 과시할 수 있는 지역 내 영향력의 크기와 질 경우의 정치적 타격을 합쳐 계산하면 답이 나온다. 대구·경북 지역이 집권세력의 지지기반이니, 앞으로의 정치적 풍향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전주 재선거도 ‘텃밭’ 다툼이다. 야당이 갈 길을 묻는 선거이기도 하다. 전주 덕진의 정동영 후보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총선에서 “뼈를 묻겠다”고 다짐했던 서울 동작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국회로 복귀하려니 마침 고향에서 선거가 있었다는 설명도 하는 모양이지만, 어떻든 ‘당선이 쉽지 않은 수도권’에서 ‘당선되기 매우 쉬운 호남’으로 옮겼다. 그가 당의장을 맡았던 옛 열린우리당은, 그런 텃밭에 안주하다간 정권을 창출하지 못한다는 노 전 대통령의 주장을 좇아 만들어진 정당이다. 그래서 영남과 수도권을 중시했다. 앞서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인사나 정책 등을 통해 동쪽의 영남을 끌어들이려 무진 애를 썼다. 동진정책이다. 그 결과가 어떠했든 지역주의 극복은 김대중·노무현 두 사람에겐 평생 과제였다.

정 후보의 귀향은 그런 노선의 포기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불확실한 명분 대신 당장의 실리를 택한 것이겠지만, 그 행동에 정치적 의미를 붙이자면 성공 여부를 장담하기 힘든 전국정당 대신 지지층이 두꺼운 호남을 베이스캠프 삼자는 ‘호남기지론’일 수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편한 선택이다. 정 후보는 이제 민주당에 맞서 이웃 완산갑 후보와 무소속 연대까지 만들었다. 이대로 가면 내년 지방선거에선 그를 중심으로 정치지망생들이 모여들 게다. 전국적 지도자라기보다 지역정치의 맹주 모습에 더 가까워진다.

진보정당들도 텃밭 다툼이란 점에선 달리 볼 게 많지 않다. 울산북구는 1998년과 2002년 구청장 선거, 200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이긴, 진보세력의 텃밭이다. 단일 후보로 되면 당선 가능성이 큰 곳이고, 진보세력 내 주도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양보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그런 욕심이 서로의 오래된 불신과 맞물려 지금껏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것 아니겠는가. 내놓은 명분과 갖은 이유를 걷어내고 보면 기존 정당보다 별반 나을 게 없는 기득권 싸움이다. 비정규직 문제나 자동차산업 구조조정 등 노동 진영의 현안에 힘과 지혜를 모으고 정책으로 지지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지역적 기반을 정치적 세력 확대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선 보통의 지역주의나 다를 게 없다.

그렇게 모두 눈앞의 ‘꿀단지’에 연연하다 보면 지난 수십년 우리 정치를 갉아먹었던 지역대결 구도가 되살아나게 된다. 제대로 된 정치는 살아날 길이 없는, 괴물의 귀환이다.


여현호 논설위원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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