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우 기자
유레카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까지 받은 영국 태생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1889~1970) 박사는 1919년 세브란스의학교 세균학 교수로서, ‘한국의 인플루엔자 유행병’에 관한 연구를 미국의학회지에 발표했다. 수천만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독감이 세계에 창궐했던 1918년, 조선 땅에도 들이닥친 이른바 ‘서반아감기’의 병원체를 밝히려는 실험과 백신 개발 시도를 담은 논문이었다.
그는 흉흉했던 상황을 이렇게 보고했다. “한국에서 인플루엔자 대유행은 1918년 9월 처음 가시화됐다. … 질병은 북쪽으로부터 철도선을 따라 남쪽으로 퍼졌다. … 인구의 1/4에서 1/2이 감염됐을 것이다. … 대부분의 학교는 문을 닫았다.” 이듬해 1월 <매일신보>는 조선에서 서반아감기 환자가 742만명이었고 13만9000명이 숨졌다는 경무총감부 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당시 병원체가 ‘파이퍼 바실루스’ 균이라는 설이 널리 퍼졌으나 ‘여과되지 않는 바이러스’도 병원체로 지목받고 있었다. 물론 바이러스란 말은 ‘병의 원인 독소’란 뜻으로 쓰였고 그 실체는 몰랐던 때였다. 스코필드는 병원체를 찾으려는 실험을 벌였다. 세균 여과 필터로 조선인 환자의 혈액을 걸러내 얻은 액을 한국인 의사한테 접종했다. 여과하지 않은 혈액은 스코필드 자신과 다른 한국인한테 접종했다. 두 사례에서 모두 증상이 나타났다. 끝내 병원체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여과되지 않는 바이러스의 존재 가능성은 보여주었다.(천명선·양일석 논문 ‘1918년 한국내 인플루엔자 유행의 양상과 연구현황’ 참조)
자기 몸에 환자 피를 접종한 스코필드의 실험은 인상적이다. 비록 파란 눈의 연구자가 주도한 연구였지만 인플루엔자와 과학의 싸움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 바이러스 정체가 드러난 것은 치열한 ‘스코필드들’이 무수히 있었던 덕분이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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