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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문화칼럼] 잃어버린 기억과 우리 옛시 / 이종묵

등록 2009-05-08 19:02수정 2009-09-14 18:50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화칼럼
문화조차 금액으로 환산해야 통하는 시대, 시라 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 한 말은 참으로 유명하다.

도시의 강렬한 불빛 때문에 별이 보이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 별을 보았는지 마지막 기억조차 희미해졌지만, 누구나 별이 창공에 빛나던 시절이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별이 보이지 않는 시대지만 별이 있던 때를 행복한 시절로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창공에 빛나는 별이 아름답다는 기억이 있는 한 언젠가는 번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창공에 빛나는 그 별을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시를 포함한 문학이 설 자리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시는 잊어버린, 혹은 그것이 오래되어 잃어버린 아름다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다.

지난 주말에는 잊고 있던 풍경을 보러 남도를 다녀왔다. 화려한 꽃은 거의 다 떨어졌지만 바람에 출렁이는 남도의 보리밭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더욱 통쾌한 일이었다. 문득 남도의 보리밭을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던 것은, 조선 전기의 학자 정여창(鄭汝昌)이 남긴 <악양에서>(岳陽)라는 시를 읽었기 때문이다.

산들바람에 부들풀은 하늘하늘
4월 화개 땅에 보리가 벌써 익었네.
지리산 천만 굽이를 다 보고 나서
외로운 배로 다시 큰 강으로 내려간다.

風蒲泛泛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流

520년 전 까마득한 옛날의 작품이라 현대인의 기억에 희미한 풍경이다. 젊은이들은 물가의 부들은 물론 보리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 곁에 콩밭이 있다 한들 분간하지 못하리니, 옛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콩과 보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숙맥(菽麥)이라 하겠다.

정여창이 음력 4월 하순, 바로 이 절기에 이 시를 지었다. 산들바람에 부들풀이 하늘거리는데, 섬진강을 끼고 펼쳐진 화개 들판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간다. 산과 물이 좋아 동문의 벗과 함께 지리산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두루 다 유람하고, 또다른 경지를 보기 위하여 섬진강을 따라 내려갔다. 어진 이가 좋아하는 산을 보았으니 지혜로운 이가 좋아하는 물을 보러 간 것이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비닐이라는 근대의 표상이 아름다운 옛 풍경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하였다. 봄날이면 남도의 들녘을 뒤덮었던 보리밭도 돈 되는 농사에 밀려 이제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정여창이 가슴을 활짝 펴고 들녘을 지나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는 시가 있어, 잊고 있던 아름다운 풍경을 기억하게 한다. 이것이 시의 힘이다. 정여창의 이 시를 읽으면 남도의 들녘으로 떠나 바람에 출렁이는 보리밭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아니하겠는가?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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