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논설위원
아침햇발
바로 34년 전 이맘때다. 유신헌법을 앞세워 영구집권을 꾀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5년 5월13일 긴급조치 제9호를 발동했다. 그는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라는 긴 이름의 올가미로 반대세력의 입과 손발을 꽁꽁 묶어두려 했다. 핵심 내용은 유신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를 못하도록 한 것이다. 더욱 악랄한 것은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조차 금지한 것이다. 점점 커지는 유신독재 반대 열기를 잠재우기 위한 극약처방이었으나 그것을 먹고 죽은 것은 반대세력이 아니었다. 박 전 대통령 자신이었다.
최근 이명박 정부가 신고제로 돼 있는 집회를 사실상 ‘허가제’로 바꿔, 촛불을 비롯한 각종 정부 비판 집회를 원천봉쇄하고 있다. 경찰은 이렇게 불법 집회를 유도한 뒤 여기에 참가한 시민을 마구잡이로 연행한다. 검찰은 검거자를 전원 기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더 나아가 과잉진압에 항의해 기자회견을 하는 사람까지 잡아들인다.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시위의 자유는 온데간데없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모두 감옥이라는 협박만 보인다. 지금 하는 행태로 보아 이런 식의 대응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가히 ‘이명박 표’ 긴급조치 9호의 등장이라고 할 만하다.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되풀이된다더니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나마 그때는 악행의 법적 근거라도 있었다. 지금은 있는 법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집행하면 그것으로 만사 오케이다. 마치 수십년간 피땀으로 일궈놓은 민주화의 성과를 하루아침에 도둑맞은 느낌이다.
정부의 압박으로 광장의 촛불은 확실히 기세가 꺾였다. 막고 몰아붙이고 때리고 차고 내리찍고 잡아 처넣는데 누군들 이런 십자포화를 견딜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촛불이 완전 진압됐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가슴속으로 잠시 자리를 옮겨 새로운 부활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움직임의 한 자락이 4·29 재보궐선거를 통해 드러났다. 선거 전날 여론조사에서 10~15%포인트 차이로 압승을 거둘 것이라던 한나라당 후보가 되레 10%포인트 차이로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와 야당의 분열이라는 이중 호재 속에서 정당 지지율 압도적 1위의 한나라당이 0 대 5의 참패를 당했다. 여의도의 상식으론 설명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길거리의 얘기를 들어보면 해답이 자명하다. 정부의 토끼몰이에 쫓겨 가슴속으로 숨어들었던 촛불들이 투표장으로 쏟아져 나와 안하무인, 독불장군 정권을 손봐줬다는 것이다. 선거 분석 전문가들도 이번 재보선 투표율이 근래에 유례없이 높았던 점에 주목하며,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이런 재보선 민심을 무시하고 여전히 ‘이대로 쭉~’만을 되뇌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촛불 참여 단체에 보조금을 중단하고, 경찰은 1년 전 일을 문제 삼아 촛불 누리꾼을 수사한다. 국가정보원도 통일단체에 대한 느닷없는 압수수색으로 맞장구를 친다. 마치 34년 전의 그때처럼 힘으로 밀어붙이면 뭐든지 제압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듯하다.
조선 건국의 밑돌을 놓은 정도전은 “백성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 속일 수 없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하지만,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임금을 버린다”고 말했다. 지금의 이명박 정권이 꼭 귀담아들어야 할 경구이다.
오태규 논설위원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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