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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적에게 배우라 / 정남기

등록 2009-05-21 22:20수정 2009-05-21 23:21

정남기 논설위원
정남기 논설위원
아침햇발
제3의 길을 주창하면서 1997년 보수당 장기집권 체제를 무너뜨린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노동당이 20여년 동안 집권하지 못한 이유를 간명하게 설명했다. “세상은 변하는데 노동당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블레어가 집권을 위해 가장 힘을 쏟았던 일은 노동당 주류와의 투쟁이었다. 블레어는 격렬한 반발 속에서 ‘생산수단의 국유화’라는 사회주의적 강령을 폐지하고 노동당을 노동조합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했다. 또 월스트리트를 방문하고 대처리즘을 일부 수용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거듭했다.

그가 개혁을 주도하면서 내건 구호가 ‘현대화’다. 그는 또 좌파의 임무를 “개방되고 경쟁력 있고 성공적인 경제를 공정하고 우아하며 인간적인 사회와 결혼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발전과 인간적인 사회 구현을 함께 추구하겠다는 취지다. 블레어는 그런 방식으로 고집불통의 노동당 주류와 결별함으로써 노동당 장기집권 시대를 열었다.

블레어가 외치던 현대화의 개념이 한국의 민주당에도 등장했다. 뉴민주당 선언의 화두로 ‘현대화’가 제시됐고, 경제성장과 사회통합을 동시에 달성하는 제3의 발전모델을 추구한다는 비전도 나왔다. 핵심 수단은 중산층과 중소기업 육성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다.

여러 면에서 블레어의 개혁론과 닮은꼴이다. 뉴민주당 선언에 포함된 ‘포용’과 ‘기회’란 개념도 사실 블레어의 현대화론에서 등장한 것들이다. 뉴민주당 선언은 블레어의 제3의 길을 모델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변화를 위한 시도가 늘 그렇듯이 반발도 있다. “한나라당과 다른 게 뭐냐”, “우경화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지금으로선 뉴민주당 선언이 변화와 발전의 계기가 될지, 갈등과 분열을 불러올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비전을 만들기 위한 변화가 시작됐다는 점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민주당에는 죽음의 길이다.

민주당만이 아니다. 한나라당도 진로를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쇄신을 주도하는 ‘민본21’의 정책 대안은 감세와 규제 완화를 뼈대로 한 기존의 한나라당 정책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대기업과 부유층에 대한 감세가 아니라 중소·중견 기업과 생계형 자영업자에 대한 감세,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소득보전과 실업예산 증액이 강조된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도 최근 미국 스탠퍼드대학 연설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개인의 이익과 사회 공동선이 합치될 때 그것이 진정한 성장이고, 정부는 소외된 경제적 약자를 확실히 보듬어야 한다”고 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학자들의 주장처럼 들린다. 민주당의 정책 방향과도 비슷하다. 박 전 대표가 보수에서 진보로 선회한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변화의 흐름을 수용하고 이념적인 유연성을 발휘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차기 대선에서 중산층을 끌어안겠다는 계산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큰 변화의 계기를 맞고 있다. 그리고 서로 이념적 간극을 좁혀가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느 시대건 과거의 이념을 고집하고 변화에 소극적인 정당은 역사의 무대에서 뒤로 밀려났다는 점이다.

진보와 보수는 서로 경쟁하고 또 서로에게 배우면서 발전하고 진화해왔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한 단계 더 발전했다. 현대 중국은 어떤가. 개혁과 개방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함으로써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민주당이 어디로 갈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적에게도 배우는 마당에 새로운 비전을 찾기 위한 내부 논쟁을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다.

정남기 논설위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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