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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학자 군주 노무현을 그리며 / 이정우

등록 2009-05-27 21:28수정 2009-05-28 15:27

이정우  경북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이정우 경북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기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 지 며칠이 지났건만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다. 금방이라도 저쪽 모퉁이를 돌아 웃으며 불쑥 나타나실 것만 같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일지 모르지만 그분이 이 세상에서 홀연 자취를 감추었다는 건 정말 믿기지 않는다.

노 대통령은 많은 지지자와 많은 거부자를 동시에 가진 분이었다. 노무현을 지지하는 이유는 ‘바보 노무현’ 때문이다. 뻔히 지는 줄 알면서 출마를 고집했고, 고생길이 뻔한데도 옳은 길만을 걸어갔다. 그는 이익보다 정의를 추구했다.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찾아가자 혜왕이 묻기를, “선생께서 불원천리 찾아오셨으니 우리나라에 큰 이익을 주시겠지요?” 맹자의 답은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 노무현은 평생 이익 대신 약자에 대한 배려와 정의를 앞세웠다. 스스로 늘 손해 보고 패배했다.

노무현을 거부하는 이유 중에는 말실수와 학벌이 반드시 들어간다. 대통령은 자신을 학벌사회, 연고사회의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돛단배로 비유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학벌과 학식은 다르다. 노 대통령은 가난 탓에 학벌은 낮았지만 학식은 높았다. 아니 오히려 학자 군주에 비견할 만했다. 조선 왕조 500년 27명의 왕 중에 성군이 누구인가. 세종과 정조다. 세종과 정조는 엄청난 독서광이었고, 집현전·규장각을 설치해서 학자들과 대화했다. 그리고 백성을 진정 사랑했다. 노 대통령은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위원회를 설치해서 학자들과 대화했다. 정책을 만들 때도 인기보다는 논리적 타당성과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정책인지를 먼저 생각했다. 특히 서민과 약자들을 생각했다.

나날이 긴장의 연속인 청와대 안에도 밥 먹고, 농담하고, 영화 이야기 하는 시간이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이 정도 여유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이럴 때 노 대통령의 주요 화제는 역사였다. 동서양 여러 나라 역사에 대해 많은 질문과 이야기를 했다. 중국 최고의 현군으로 불리는 당 태종은 자신이 세 개의 거울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얼굴 보는 거울, 바른말 하는 신하 위징, 그리고 역사였다. 위징이 죽었을 때 태종은 오늘 거울을 하나 잃었다며 슬피 울었다. 노 대통령은 끊임없이 역사를 되돌아보려고 노력한 점에서 당 태종과 비슷했다. 직언을 잘 수용한 점에서도 비슷하다. “요즘 청와대에 위징이 너무 많아 일하기가 힘들어”라고 농담하던 노 대통령이었다.

봉하에 내려간 학자 노무현은 더 열심히 공부했다. 주경야독, 그야말로 평생학습의 실천자였다. 그는 국가가 할 일이 무엇인가란 주제를 놓고 책을 쓰고 있었다. 올해 초 몇 달은 오로지 독서와 집필 말고는 다른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지난번 찾아뵈었을 때, “이 교수, 차비 대 드릴 테니 자주 오세요”라고 웃으며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노 대통령이 남긴 유서에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는 말이 너무 가슴 아프다.

아, 이런 훌륭한 대통령이 일찍이 있었던가? 퇴임 후 고향에 돌아가 농사짓고 책 읽는 대통령이 일찍이 있었던가? 부엉이바위에서 내려다본 내 집과 고향 마을은 과연 어땠을까? 이렇게 빨리 가실 줄 몰랐는데… 후회가 가슴을 저민다. 좀더 자주 찾아뵐 것을. 이익보다 인의를 앞세웠던 그분이 그립다. 평생을 양심 하나로 살아온 그분이 그립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설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난닷 도셔오소서!

차비 대 드릴 테니 부디 돌아오소서!


이정우 경북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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