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논설위원
사무실 책상 앞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 전문을 신문에서 오려 붙여 놓았다. 눈길이 갈 때마다 읽고 또 읽어 본다. 유서의 행수는 고작 14줄, 글자 수는 모두 합쳐 171자밖에 되지 않는다. 노 전 대통령이 한때 애독했다는 <칼의 노래> 작가 김훈은 평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문장은 주어와 동사만으로 이뤄진 글이라고. 예전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이제 그 말의 의미를 절감한다. 그의 표현대로, 아무런 수사적 장치 없이 강력한 주어와 동사로만 이루어진 문장, 그럼에도 만지면 찌르르하는 고압 전류가 흐르는 문장이 존재할 수 있음을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은 언어의 힘을 신뢰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어를 통해 이 세상을 설명하고, 사람들을 설득해내고, 궁극적으로는 말로 이 세계를 개조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무망하고 부질없어 보일 때가 많았다. 침묵의 위엄을 보여야 할 때 다변으로 대응하는 것이 안타까웠고, 제왕의 언어를 써야 할 때 남루한 시정의 언어를 쓰는 데 짜증이 나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때 그가 고적한 밤, 청와대 안에서 컴퓨터를 마주하고 국민들이나 여당 의원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혀를 찬 적도 있다.
그의 언어 앞에 놓인 절벽은 높았고, 골은 깊었다. 이미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하는 세상 앞에서는 아무리 장강대하처럼 긴 글도 무용지물이었다. 그의 죽음은 끝내 말로 납득되지 않는 현실의 벽을 확인시켜준 서글픈 결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패배만은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동시에 언어의 힘을 부활시켰다. 정처를 잃고 떠돌던 말은 다시 소통의 단비를 맞으며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죽음은 이 척박한 토양에 ‘말과 희망’이라는 새로운 씨앗을 뿌렸다.
정치의 세계는 본래 말과 칼이 함께한다. 어느 권력자도 말만으로 통치하지 않고, 칼로만 다스리지도 않는다. 다만 개인별로 조금씩 차이가 날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느 쪽이냐 하면, 애초에는 말도 아니고 칼도 아닌 어정쩡한 유형에 속한 것처럼 보인다. 언어영역 성적 우수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칼의 신봉자도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는 어느 때부터인가 급속히 칼로 기울었고, 그만큼 말과는 아득히 멀어져 갔다.
이 대통령은 엊그제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가 중심을 잡고 일을 해야 한다” “국민의 가장 큰 갈증은 역시 경제다.” 언어는 소통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그런 말은 소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절을 심화한다. 그 말은 국민이 꼭 알아야 할 말이 아니다. 그러니 밖으로 공표할 게 아니라 그냥 자기들끼리 알든가 말든가 하면 되는 말이다. 청와대는 아직도 그것을 모른다.
권위의 진정한 본질은 커뮤니케이션이다. 말길이 끊어지면 권위는 몰락한다. 단호한 지시나 불호령이 모두 말은 아니다. 가뜩이나 진정성 결핍증을 앓고 있던 이 대통령의 말의 가치와 위엄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 더욱 땅으로 추락했다. 한때 칼이 세상을 다스리는 유용한 수단으로 작동하는 듯 보였으나, 이미 칼은 무뎌져버렸다. 그 칼은 아무리 휘둘러도 떠나버린 민심을 베지 못한다. 이 대통령이 당면한 위기의 본질은 말도 칼도 잃어버린 상황이 돼버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큰 위기는 이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이 그 심각성조차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김종구 논설위원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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