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논설위원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당일치기로 일본을 방문해 아소 다로 총리와 회담했다. 두 정상이 만난 것만 벌써 8개월 만에 여덟번째다. 둘 사이의 레퍼토리도 정해져 있다. 서로 힘을 모아 ‘나쁜 북한’을 혼내 주자는 것이다.
이번 회담은 일본 쪽이 오래전부터 ‘빨리 와 달라’고 채근해 이뤄졌다. 아소 총리가 이 대통령의 조기 방일에 집착한 이유는 간명하다. 자신의 어려운 정치적 입지를 대북 카드로 만회해 보자는 것이다. 아소 총리는 조만간 중의원 선거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현재 지지율이 최악이다. 민주당에 정권을 내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에 아소 총리는 반전을 위해 인화성이 큰 대북 카드를 꺼내 들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한-일 정상회담을 선택했다.
친구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돕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냉철한 이해관계 속에서 움직이는 국가간의 관계에선 사정이 다르다. 사적 인연을 앞세웠다가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이번 경우가 바로 그렇다. 아소 총리가 정권을 내줄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그를 돕자고 달려갔으니, 경쟁 당인 민주당 쪽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안 봐도 눈에 선하다. 귀중한 ‘외교자산’을 최악의 방식으로 퍼준 셈이다.
이 대통령의 ‘대일 퍼주기 외교’는 이번만이 아니다. 올해 초 아소 총리가 방한한 이후 이런 모습이 특히 두드러진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열린 지난해의 3·1절 행사에서 “한국과 일본도 서로 실용의 자세로 미래지향적 관계를 형성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기념사를 했다. 그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일본도 역사를 직시해서 불행했던 과거를 현재의 일로 되살리는 우를 결코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대일 경고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의 3·1절 기념식은 90주년이라는 의미 깊은 행사였음에도, ‘일본 프렌들리’가 유난히 돋보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지적하는 내용이 빠진 것이다. 더욱 상징적인 일은, 그로부터 열흘 뒤인 3월11일에 벌어졌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가 그토록 원했던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씨와 일본인 납치자 가족의 면담을 전격 주선해 준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반북 분위기를 고조하는 데 한껏 활용했고, 아소 총리 등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이 대통령의 ‘배려’와 ‘용단’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러면 이 대통령이 이런 화끈한 퍼주기 정책의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얻은 것은 무엇일까. 일본 정부가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로잡겠다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대일 무역수지가 줄어들지도 않은 것을 보면, 아직 ‘말 이상의 것’은 없는 듯하다. 오히려 야부나카 미토지 외무차관은 정상회담 바로 다음날, 이 대통령이 공들여 주장하고 있는 5자회담에 대해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깎아내렸다. 친구를 도와주러 갔다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꼴이다.
이 대통령은 그래도 자신의 주도로 두 나라가 사실상 대북 압박 동맹을 형성한 것을 큰 성과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남북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한국 없는 한반도 문제’의 구도를 더욱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1994년 제네바합의 때만 봐도, 남북관계가 최악일 때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목소리가 가장 약했다. 더구나 한-일 관계는 한창 맑다가도 ‘과거사 폭탄’이 한 방 터지면 순식간에 천둥비로 변하는 게 보통이다. 당장 좋은 것 같다고 마구 퍼주다가 소도 잃고 외양간도 잃을까 걱정이다.
오태규 논설위원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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