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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노동부 눈치 보기 / 남종영

등록 2009-07-07 21:12

남종영  사회정책팀 기자
남종영 사회정책팀 기자
얼마 전에 취재 거부를 당했다. ㄱ사는 건실한 중견 기업이다. 이 회사는 최근 비정규직 일부를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다들 비정규직을 자르는 마당에 ‘기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취재를 위해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홍보팀 직원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규직 전환한 건 사실인데요, 뭐 지난해에도 했고, 그리 특별한 사실은 아니거든요. 그냥 안 써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 왜죠?”

“그냥 우리한테는 안 써주시는 게 도움이 돼요. 굳이 이런 거 세상에 알리기 싫거든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서도 취재를 거부하는 그 심정은 무엇일까. 그들은 왜 굳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려는 것일까.

기자들은 종종 취재 거부를 당한다. 수억원을 쾌척한 익명의 기부자뿐 아니라 정부 관계자, 말단 경찰도 취재를 거부할 때가 있다. 심지어 지난해 전국 유명 빵집 취재를 위해 찾았던 경남 한 소도시의 찐빵집에서도 곤란을 겪은 적이 있다. “저희는 그런 거 안 함니더”라는 주인아주머니를 회유 설득하기 위해 직접 찾아가 단팥죽이 뿌려진 찐빵을 포크로 찍어 먹으며 설득했지만 아주머니는 단호했다. ‘한국전쟁 전부터 빵집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 말고는 소득이 없었다. 하지만 기분은 씁쓸하지 않았다. 어쨌든 아주머니는 신문에 나는 게 귀찮았을 뿐이니까.

그러나 이번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박수 받을 일일 텐데, 그들은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7월이 되면 비정규직 100만명이 해고될 거라고 정부가 한참 부르짖을 때였다. 점차 많은 기업들이 정규직 전환 사실 때문에 속앓이를 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때만 해도 몰랐다.

정부의 개정 의도와 달리 비정규직법의 정규직 전환 조항은 지난 1일부터 예정대로 시행됐다. 2007년 7월1일 이후 근로계약을 체결한 계약직 노동자를 2년 뒤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조항이 발효된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비정규직의 남용을 방지하고 정규직화하자는 좋은 취지임이 분명하다.

좋은 취지로 만든 법이라면 최소한 그 취지를 살리는 선의의 노력이 보여야 한다. 하지만 법이 시행됐는데도 주무부처인 노동부는 비정규직법 개정에만 몰두하고 있다. 장관은 비정규직 사업장을 방문하고 기업체 인사부장을 불러 법 개정 여론 만드는 데 힘을 쏟는다. 직원들은 마치 ‘해고 대란설’을 입증하는 게 최우선 임무인 것처럼 비정규직 해고 사례 수집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정규직 전환 사례는 7일에야 처음 발표됐다. 이런 정부의 신호 때문에 기업들이 정규직 전환 홍보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다. 취재 과정에서 “보도하면 곤란해진다”, “정부에 반대되는 것처럼 비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듣는 이유다.

노동부는 입법부가 아니라 법을 시행하는 행정기관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현행법의 취지에 따라 정책을 펴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정규직 전환을 독려하고 부당 해고를 감시해야 한다. 이미 한 번 국회가 노동부의 뜻을 ‘배반’했지만, 또다시 배반하면 어떡할 건가. 최악의 시나리오는 여야 협상이 장기 교착상태에 들어가고, 노동부는 법 개정만 추진하고, 현행 비정규직법은 ‘식물 법률’로 전락하는 경우다. 누구도 그 무엇도 얻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직원 수십명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킨 기업이 취재를 거부한 이유가 단지 “저희는 그런 거 안 해요” 때문이었을까. 2년 만에 법안의 선의에 눈감고 개정을 부르짖는 정부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닐까.

남종영 사회정책팀 기자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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