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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합당 전야 / 여현호

등록 2009-07-13 21:26

여현호  논설위원
여현호 논설위원
1990년 1월21일 일요일, 폭설이 내렸다. 신혼 집들이에 초대한 손님들이 교통대란으로 모두 늦었다. 눈을 떨며 들어선 친구들 부부가 미처 앉기도 전에 ‘삐삐’(호출기)가 울렸다. 중대 발표가 있다니 빨리 출근하란다. 손님들을 남겨둔 채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시작된 취재는 자정까지 이어졌다. 신문을 만들지 않는 휴일인 탓에 기사 한 줄 쓰지 못하고 돌아오던 새벽길, 이제 한국 정치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절대 놀라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3당 합당이 공식 선언되기 바로 전날의 일이다.

3당 합당이 느닷없는 일만은 아니었다. 그 한 달 전에는 박준규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가 양당 구도로의 정계개편과 민정당 해체를 언급했고, 그 두어 달 전부터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부쩍 자주 만났다. 무슨 일이든 전조는 있는 법이다.

지금도 심상찮은 조짐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연대한다는 ‘충청권 연대론’이다. 곧 있을 개각에서 충청 출신이 총리로 기용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파다하게 퍼졌다. 이 총재와 한나라당은 이를 부인했다. 하지만 불씨가 꺼진 것 같진 않다. 손을 잡으면 양쪽 다 분명한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정국을 주도할 동력이 약해진 이명박 정부로선 당장 쟁점법안 통과나 눈앞의 재보선·지방선거를 위해서라도 도움이 절실하다. 이 총재로선 제3당의 힘을 극대화해 권력 분점을 노려볼 만한 시점이다. 보수 대연합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부활에 놀란 어떤 이들의 희망이기도 하다. 벌써 보수언론의 ‘대망론’이 나온다.

나온 말로만 보면 그 정도에 그치지도 않을 것 같다. 지난달 이명박 대통령은 ‘이념과 지역 갈등 등 고질적 문제에 대한 근원적 처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중도강화론’도 언급했다. 인위적 정계개편을 시사하는 말로도 들린다. 그 며칠 뒤에는 ‘호남에서 한나라당, 영남에서 민주당 의원이 나올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전해졌다. 그런 제도는 중대선거구제나 비례대표 할당제다. 그즈음 시·군을 몇 개씩 묶자는 지방행정체제 개편 법안이 발의됐다. 행정구역 광역화는 현행 소선거구제보다 중대선거구제와 친화력이 높다. 그런 선거제도에선 영남의 박근혜 등 지역에 강한 세력 기반을 지닌 정치인의 압도적 영향력은 줄어들게 된다.

개헌 논의를 서둘러 발진시키려는 움직임도 공교롭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내년 지방선거 이전까지 개헌을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려면 올해 안에 본격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지금 거론되는 이념·지역 대결 지양 등의 정치적 명분과 선거구제 개편론과 맞물리면 개헌 논의의 기류도 달라질 수 있다.

이리저리 엮어보면 음모론의 구미를 당길 만한 일들이 동시다발로 벌어지는 모양새다. 당 안팎 반대세력의 고립과 안정적인 정권 재창출 기반 마련이 그 목표일 수 있겠다. 아직은 가능성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큰 그림’을 그리는 이가 정녕 있다면, 그 꿈을 현실화할 힘은 있을까. 거론되는 일들은 하나같이 나라를 큰 논란으로 몰고갈 거대 과제다. 국민 지지라는 동력을 잃은 정권의 힘만으론 감당하기 힘들다. 배제와 담합의 논리로 시작할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정치공학적 계산이 끝내 배신당한 일은 3당 합당 말고도 많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고 했던가. 집권 1년 반도 안 된 이명박 정부는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개발논리와 강압통치를 들이대다 시민들의 항의를 받더니 이젠 유사 3당 합당까지 꿈꾸는 듯하다. 지난 수십년 축적된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 학습효과는 그런 시도에 어떻게 답할까.

여현호 논설위원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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