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형석 대중문화팀장
ㄱ형!
지난주 소백산 죽령 고개를 넘고 왔습니다. 장마철 비구름들 사이로 언뜻 비치는 첩첩 능선들이 허리선을 부드럽게 겹치면서 펼쳐내는 풍경에 눈을 앗겼습니다. 키(해발) 689m에, 나이 1800살 넘었다는 죽령을 슬렁슬렁 내려가는 기분이 짐작되는지요. 도솔봉, 연화봉 사이의 고갯마루에서 단양으로 내려가는 죽령 옛길 말입니다. 4㎞ 넘게 걸었지만, 눈맛과 대기의 청량감에 피곤함도 몰랐습니다. 나라 안 유적들을 쉼없이 도는 답사광인 당신에게 뻐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꼭 나누고 싶은 느낌이 있어 글월 적습니다.
1박2일 산행길은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과 함께 한 문화생태탐방로 시범답사였습니다. 첫날 경북 풍기·영주의 죽령 옛길은 장맛비로 질척거렸지만, 둘째 날 단양 죽령터널로 내려가는 길은 마냥 개운한 여정이더군요. 죽죽 벋는 소백산 지맥의 빽빽한 낙엽송과 죽령천 계곡에 앉은 민가의 사과밭·옥수수밭이 반겼습니다. 그 풍광을 보면서 “장관 안 하고 싶다면 거짓말”이라는 실세 문화부 관료의 고백(?)과 158년 신라인 죽죽이 처음 닦은 이래 펼쳐진 고대 삼국의 죽령 쟁탈전, 산신 ‘다자구’ 할머니 등에 얽힌 전설 등을 새겨들었습니다.
고개 아래 용부원 2리를 지날 무렵, 언덕배기의 옛 신라 절터 보국사지에 들어섰습니다. 들어서자마자 4m 넘는 석불 입상이 눈에 가득 들어옵니다. 머리와 오른손이 잘리고, 몸도 네 토막 났던 것을 땜질해 붙인 신세지만, 훤칠한 옛 용모를 대번에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감 넘치는 왼손, 하반신의 와이(Y)자 옷 주름을 무릎 쪽에서 유려한 브이(V)자 모양으로 갈무리한 옷매무새의 특출한 조각 솜씨 등등은 경주 석불들 못지않더군요. 옷 주름 새김을 만지며 산중 수행 하듯 돌을 매만졌을 신라 장인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신라 술종공이 죽령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거사의 죽음을 기려 만든 미륵상이 바로 이 석불일 것이라는 전설도 아련함을 더했지요. 안쓰럽게도 불상과 절터 유물들은 이산가족 신세입니다. 불상의 발은 1970년대 서울 한 대학 박물관이 가져갔고, 80년대 지표조사 때 나온 절터의 대나무마디무늬(죽절문) 돌기둥은 경북 영주의 한 민속주점 조경석이 됐다고 합니다. 석불, 절터가 지정 문화재가 아닌 탓에 보존 예산은커녕, 흩어진 유물 모으기도 난망하다는 게 단양군청 쪽의 설명이었습니다.
퍼뜩 이 땅의 숱한 이산 문화재들을 헤아려 봤습니다. 일제 강점기, 박정희 정권 때 불상은 청와대에, 석탑 부재는 불국사 역전 장식탑 옥개석으로 빼앗겼던 경주 이거사 절터의 비극은 여전하지요. 70년대 발굴한 전남 신안 해저유물은 소장처 간 신경전으로 국립광주박물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북한 개성 현화사에 석탑과 나란히 있던 석등은 일제 때 서울에 부서진 채 반출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통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4대강 개발 사전조사에 공력을 쏟는 문화재청이 그 역량의 10분의 1이라도 이산 문화재 실태 조사에 투여할 수 있다면.
요즘 관광 문화유산 쪽은 ‘스토리텔링’이 화두입니다. 정부, 지자체가 앞장서 옛길, 유적에 이야기를 붙이려고 애씁니다. 귀에 솔깃할 야담, 전설, 영웅담도 좋지만, 외면하곤 하는 문화유산들의 근대 수난사 또한 자자손손 공유할 이야기로 자리매김해야 하지 않을까요. 서사는 건물 짓듯 뚝딱 지을 수 없습니다. 바탕이 되는 기억은 슬픔과 치욕을 포함한 한 사회의 총체적 체험과 의지 욕망이 어우러져 생기는 까닭입니다. 죽령 폐사지의 석불상 위로 매암 도는 잠자리 떼가 지금 우리들 모습이 아닌가 생각하며 절터를 내려왔습니다.
노형석 대중문화팀장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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