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논설위원
제15대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인 1997년 12월 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신년휘호를 ‘송무백열’(松茂柏悅)로 정했다.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쁘다는 뜻이다. 누가 봐도 소나무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잣나무는 김영삼 대통령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참모진 안에서 “너무 저자세가 아니냐”는 반론이 강하게 제기됐다. 결국 이 신년휘호는 발표 직전에 폐기되고, 대신 제심합력(齊心合力)이라는 평이한 사자성어가 채택됐다.
그 무렵은 두 사람의 오랜 애증의 역사 속에서 사이가 매우 좋았던 시기에 속한다. 대선 직후 ‘뜨는 해’와 ‘지는 해’ 사이에 형성된 묘한 역학관계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밀월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디제이를 향한 와이에스의 비판과 독설이 시작됐고 둘의 관계는 다시 멀어져 갔다. 두 사람이 단둘이 만난 것은 2000년 6월 디제이가 평양 방문을 앞두고 와이에스를 청와대로 초청한 것이 아마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최근 와이에스가 디제이를 병원으로 찾아간 것이 화제다. 하지만 이를 양김의 역사적인 화해로까지 격상시켜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과대포장 같다. 디제이의 병세가 위중해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을 화해했다는 것인지, 내용과 실체부터가 아리송하다. 와이에스가 그 직전까지도 “김대중씨는 이제 입을 닫아야 한다”고 쓴소리를 한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오히려 확인된 것은 세월이 흘러도 녹슬지 않는 와이에스의 뛰어난 정치감각이다. 그의 방문을 시작으로 디제이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던 사람들의 병문안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시기 선택’이나 언론의 관심을 끄는 ‘적절한 멘트’ 면에서 와이에스를 따라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와이에스의 디제이 병문안이 과대포장된 밑바탕에는 이 만남을 굳이 화해로 보고 싶어하는 주변사람들의 심리도 한몫 거든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이 손잡고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 그리고 그들의 분열에서 비롯된 상처와 분노, 안타까움 등에 대한 보상심리 같은 게 내포돼 있다. 이제는 아련한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지만, 개혁세력 진영의 이합집산과 지역주의 등의 문제에서 두 사람의 분열과 반목은 큰 오점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사족이지만, 두 사람의 화해를 대문짝만하게 다룬 언론 보도를 보면서 이런 의구심이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요즘 젊은 독자들은 “옛날에 저분들이 싸웠대요?”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까.
사실 두 사람의 경쟁은 이미 오래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최소한 디제이가 대통령이 됐을 때, 아니 더 늦춰 잡아도 그가 청와대를 나오면서 경쟁은 끝났다고 보는 게 맞다. 그 뒤의 상황은 엄밀히 말하면 디제이를 향한 와이에스의 일방적 공격과 비난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 같아서는,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통령도 지냈고 이제는 현실정치에서도 한발 물러섰으니, 국가원로로서 마음 편하게 나라의 장래를 위해 힘을 합쳐도 좋으련만 그러지 못했다.
세월의 힘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영원히 푸르름을 유지할 것만 같던 소나무도 이제는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다. 와이에스의 병문안은 그런 소나무를 지켜보는 잣나무의 동병상련의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사회가 다시 과거의 터널로 후진하고 있는 이때, 한때 민주화 운동의 기수였던 잣나무의 역할은 없는 것일까. 물론 가장 간절한 소망은, 소나무가 다시 푸르름을 되찾아 잣나무와 함께 마지막 위용과 기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송무백열이여 다시 한번!
김종구 논설위원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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