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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환히 웃으며 돌아오세요 / 한홍구

등록 2009-08-19 20:57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 90을 바라보는 나이이니 장수하셨다. 그런데 슬프다. 너무 슬프다. 더 오래 사실 수 있었는데 … 더 오래 사셔야 하는 건데 …. 지난 5월 몸의 반쪽이 무너지는 일을 당하시고, 남은 반쪽으로 무리를 하시다가 … 몇 년 일찍 보내드린 아픔은 그래도 견딜 수 있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게,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좋은 꿈이 아니었다. 편안하게 가셨다는 병원 당국의 설명과는 달리, 그분은 악몽을 꾸고 울면서 가셨다.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인터넷에서 ‘서거’라는 두 글자를 본 것은 마침 그날 저녁 한겨레신문사 특강에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의 역사를 다루기로 하여 강의안을 작성하던 중의 일이다. 멍한 머리로 기억을 애써 더듬어가며 그분이 걸어온 길을 정리하려 하였지만, 그의 삶은 곧 한국 현대사였다. 그 굽이굽이에 남긴 참으로 많은 업적과 깊은 발자취를 어찌 90분 짧은 강의안에 다 기록하겠는가? 박정희를 위협한 박빙의 대통령 선거, 납치에서의 기적 같은 생환, 다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내란음모 조작 사건, 양김의 분열과 선거의 패배, 대통령 당선, 남북 정상회담, 노벨평화상 수상 등 하나하나가 장편소설로 써도 모자랄 진한 이야기들로 점철된 것이 그의 생애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삶에서 가장 빛나고 오래 기억될 모습은 입원하시기 직전의 마지막 두 달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10년간의 민주정권을 지내면서 사람들은 다 싸우는 법을 잊어버렸다. 촛불이 꺼진 뒤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충격과 슬픔과 분노를 겪고도 겨우 시국선언이나 했을 뿐, 우리의 근육은 살아나지 않았다. 현재진행형으로 숨 돌릴 새 없이 세상은 거꾸로 가는데, 우리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때 중심을 잡아주신 분은 단연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역주행을 처음 지적하고, 현재의 문제를 민주주의의 위기, 서민경제의 위기, 남북관계의 위기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이명박 정권의 본질을 독재정권이라 규정하고, 민주당, 진보정당, 시민사회 등 민주연합세력의 대동단결이라는 방안을 제시한 것은 다름 아닌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터뜨린 오열이 보여주듯 가장 깊이 슬퍼하면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행동 없는 양심은 악의 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처절하도록 간단한 진실을 온몸으로 보여준 분은 바로 그분이었다.

위기는 이명박 정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말씀처럼 악의 세력과 다퉈서 이기는 것도 아주 쉽고, 지는 것도 아주 쉽다. “아무것도 안하면 지니까.” 사람들이 다 싸우는 법을 잊어버렸을 때, 그분은 꼭 각목을 휘두르지 않고도, 고문당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법을 제시하셨다. 답은 복잡하지 않다. “공개적으로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하고,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를 하지 않으면” 되고, 나쁜 신문 보지 않고, 집회에도 나가고, 인터넷에 글 올리고, “하다 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고 연부역강한 젊은이들이 “하루도 쉬지 말고 민주화, 서민경제, 남북화해를 위해 힘써 달라”고 부탁하셨다. 특별한 유언이 따로 없으셨다고? 그분은 온몸으로 유언을 쓰고 간 것이다. 그분은 가만히 계시기만 해도 비바람을 막아주고 뙤약볕도 막아주는 지붕 같은 분이었다. 이제 우리는 지붕 없는 한데에 나앉았다. 부디 그분이 남긴 정치적 유산을 탐하지 말고, 유지를 잇도록 하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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