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형석 대중문화팀장
‘아, 죽음은 누구나 겪는 일이다. 요, 순 등의 성인이나 우왕, 탕왕, 주공, 공자, 맹자같이 현명한 이들도 다 죽었다. 밤낮 바뀌고 추위와 더위가 교대하는 것과 같은데, 어찌 죽음만 싫어하고 살기만 좋아할 것인가?’
3년 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서 우연히 보았던 고려시대 문신 박황(?~1152)의 무덤 묘지명 글귀는 서늘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죽음에 대해 이토록 솔직담백한 고백이 또 있을까. 도교적 이상향을 꿈꾸며 푸른 소를 타고 관청에 출근하며 밤에 불경을 외웠다는 관리 윤언민의 묘지석(1154)은 야릇한 판타지를 뭉실뭉실 피워올렸다. 땅신에게 무덤터를 샀다는 뜻의 문구를 흐늘흐늘 괴팍한 글씨체로 새긴 송천사 주지 세현의 매지석(買地石) 앞에서도 고려 선조들이 생각했던 생생한 죽음의 단상들을 엿볼 수 있었다. 숱한 내우외환으로 바람 잘 날 없는 삶을 살았던 고려인들은 그만큼 죽음이 언제나 삶 곁에 가는 길동무라는 것을 몸으로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경구인 ‘메멘토 모리’를 선조들은 그들 나름대로 실천했던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이 박물관 1층에 들어선 고려실 안의 장례 유물들에서도 3년 전의 상념이 되살아났다. 특히 동서남북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신의 무늬가 사방에 새겨진 석관은 예술로 승화한 ‘메멘토 모리’의 아름다운 정수였다. 그 앞에서 한동안 발길을 뗄 수 없었다. 화장한 망자의 유골을 담았던 이 석관은 옆면의 동서남북 판석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 동물을 정교하게 돋을새김하고 그 안쪽 면에는 꽃과 꽃병을 그려놓았다. 관을 덮은 뚜껑 바깥 면에 그윽한 비천상과 꽃을, 안쪽 면에는 카시오페이아 별자리와 북두칠성을 새겨놓았다. 사신이 지키고 뚜껑 내외 면에 꽃과 비천상이 흐드러지게 어우러진 석관 안의 또다른 세상. 망자는 관 뚜껑의 별을 보며 저승으로 떠나기 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았을까. 상상의 신과 현실의 꽃, 별들이 어우러진 아담한 망자의 공간은 삶과 죽음이 대립되지 않고 서로 하나로 어우러지는 화엄의 공간이었을 터이다.
700~800년 전 선조들의 유물에서 우러나오는 다감한 죽음의 이미지들이 일러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날 속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까맣게 잊곤 하는 죽음의 현존성이다. 굳이 불교의 윤회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죽음은 자연의 순환 과정으로서, 언제나 우리 삶 언저리에서 함께 굴러간다. 삶과 함께하는 죽음의 본질을 마냥 피하고 덮어두려는 것이 당연한 본성처럼 굳어진 지금, 죽음은 산 자와 망자를 피곤하게 격리시키는 가시철망으로 돌변하곤 한다. 민주화와 남북 화해에 인생을 걸었고, 결국 그 위업을 나름 일궈낸 전직 대통령의 최후는 여느 망자의 최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슬피 우는 가족들 곁에서 눈을 껌벅이며 눈물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다 여느 망자들처럼 결국 사신의 부름 앞에 이끌려 그의 혼은 떠나갔다. 온 들판을 베는 낫처럼 세월이 불러오는 죽음의 호출 신호는 만인 앞에 고루 울려퍼진다.
전직 대통령의 임종 광경을 전하는 신문 기사를 보며 고려 문신 박황의 묘지명 글귀와 스페인의 거장 고야의 개 그림을 떠올렸다. 죽을 때까지 죽음을 들여다보며 붓질했던 거장 고야는 파도처럼 덮쳐오는 거대한 멸망의 공포 앞에서 텅 빈 눈동자를 힐끔거리는 개의 대가리를 그렸다. 200여년 전 그린 그 개의 모습은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메멘토 모리!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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