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오늘도 양복 안주머니에서 때 묻은 까만 수첩의 첫 장을 펴든다. “퇴수”(退修), 물러나 자신을 연마한다. 작년 8월 미국 스탠퍼드대로 1년간 안식년을 떠나는 내게 김대중 전 대통령은 토인비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가서 쉴 생각 하지 말고 미래를 대비해 공부하라”며 김대중평화센터 이름이 선명한 수첩을 주었다. 그리고 미국 체류 동안 나는 “퇴수”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기력하게 인터넷을 통해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의 퇴행을 온몸으로 막으며 노구의 마지막 기력을 불사르는 김 전 대통령을 보았다.
갈등과 대결로 점철된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장으로 이동시킨 역사의 견인자. 비록 이 역사적인 지형의 판갈이가 아직도 진행형이라 종종 대결의 시대로 퇴행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일기도 하지만, 이를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만들어 낸 지도자.
김 전 대통령은 이것만으로도 역사에서 자기 할 일을 충분히 다했음에도, 생의 마지막 불씨까지도 거친 이 길을 개척하는 데 태웠다. “오죽이나 젊은 우리가 못났으면 병든 노구의 그분이 아직도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향한 싸움터의 선봉장이 되셔야 하느냐”는 자책이 가슴속을 후벼 파고드는 가운데, 속절없이 그의 서거라는 비보를 듣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 병상에 눕기 전 어느 모임에서 이제는 쉬셔야 한다는 마음에서 “죄송합니다. 이제 저희들이 더 분발해서 나서겠습니다”라고 결의도 표시해 보았지만, 그는 이제 우리 곁에 없다.
김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대북 포용정책을 구상하고 실천하였으며, 이를 통해 민족 화해와 평화의 가치를 손에 잡히는 이익으로 바꾸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갈등과 적대의 남북관계를 화해협력의 관계로 전환시키고, 북한의 호전적인 태도를 완화시키고자 한 포용정책은 지난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새로운 남북관계의 지평을 열었다. 아마 그처럼 남북문제에 대해 확고한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경우에도 일관되게 나아가는 지도자가 아니었다면, 긴장의 파동이 수시로 요동치는 남북관계 속에서 포용정책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우리에게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의 병행추진이라는 전략적 지혜를 유산으로 남겼다. 한반도의 근본적인 안보위협은 분단 이래 지속되어온 남북간 군사적 대치와 긴장상태이며, 북핵 문제는 1990년대 이후 여기에 한꺼풀 덧씌워진 위협구조이다. 따라서 북핵 위기가 충돌로 비화할 경우 그 지점은 지리적으로 붙어 있는 남북 경계선의 어느 부분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남북관계의 안정적 관리는 아주 중요하다. 남북관계의 개선은 우리가 북한을 설득해서 북핵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만약 선핵포기론의 입장을 고수하다가 우리와 상관없이 북핵문제가 해결될 경우 자칫 북-미 관계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는 데탕트로 나아가는데 남북관계만 파탄지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외교적 미아 신세로 전락하는 불행을 맞이할 수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러한 전략적 이해를 간파하고 북핵문제와 남북관계 병행을 정책노선으로 제시하고 추진하였다.
참여정부 시절, 나는 남북관계에서 중요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김 전 대통령을 찾아 귀중한 가르침을 얻었다. 그때마다 뜨거운 가슴으로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감싸안고, 위기에 찬 한반도를 냉철한 이성의 눈으로 응시하며 화해협력의 시대를 개척해온 거인의 풍모를 접했다. 생의 마지막 숨길까지도 민족화해의 길에 바친 그를 이제라도 편히 쉬게 하는 길은 뒤에 남은 우리가 평화번영과 통일 한반도 실현을 위해 포용정책의 기반 위에서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것뿐이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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