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대기자
요즘 대학생들은 현대사 사건을 시대순으로 배열하라는 문제를 가장 껄끄럽게 여긴다는 얘기를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한 교수한테 들었다. 예를 들어 5·18, 6·29, 5·16, 4·19를 시기적으로 앞선 순서부터 적으라고 하면 헤매는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그 시대를 몸으로 겪은 세대와 교과서에서나 배운 세대의 인지 민감도가 비슷할 리가 없다.
우리 현대사의 한복판에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제 역사 속 인물이 됐다. 오랜 기간 기자로서 지켜보았던 처지에서 몇 가지 머릿속에 새겨진 대목이 있다. 첫째, 말하는 것을 그대로 써도 기사가 되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의 한 사람이었다. 1960, 70년대만 해도 야당 대변인 가운데는 성명서 하나 제대로 작성하지 못해 출입기자가 대신 써주고 일일이 훈수까지 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는 그런 시절에도 ‘명대변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둘째, 권력기관 특히 정보기관의 탄압을 그렇게 혹독하게 받은 정치인은 유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는 오랜 기간 디제이(DJ)로 불려왔지만, 중앙정보부나 그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의 공작 문건에는 철저히 케이티(KT)라는 약칭으로 기재돼 있다. 디제이처럼 대중에게 친숙한 이미지가 아니라 불온세력의 온상으로 규정하는 자기최면의 일환으로 생각될 정도다.
셋째, 그의 고통과 수난이 국제적 지원운동을 촉진해 역설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는 데도 크게 기여를 했다. 납치사건이 일어났을 때 구원운동에 나섰던 일본의 소장 정치인과 학자들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85년 총선을 앞두고 미국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을 때, 저명한 해외 인사들이 대거 동행했다. 그런 대접을 받은 한국의 정치인은 그가 유일할 것이다.
넷째, 퇴임 뒤에도 자신의 이름이 붙은 도서관이나 아태평화재단을 기반으로 정력적으로 활동을 했다. 외국의 저명한 재단이나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 해외강연도 여러 차례 했다. 왜 다른 전직 대통령들은 그렇게 하지 못할까? 요즘 용어로 하면 콘텐츠의 차가 워낙 크기 때문일 것이다. 디제이의 측근인 박지원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 말기 “60대 나이의 대통령이 물러나서 그 긴 여생을 어떻게 보낼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 사석에서 말한 적이 있다. 노무현의 급작스런 비극적 죽음이 너무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1987년의 대통령 선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유력 출판사인 이와나미서점의 사장을 지냈고 월간지 <세카이>의 편집장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야스에 료스케란 사람이 있다. 90년대 초반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고지엔>이란 유명한 일본 국어사전을 증정받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사전에 쓰면 나중에 입국할 때 책을 압수당할지도 모른다며 특이하게도 백지에 이름을 써서 사전 속에 끼워 주었다. 그는 디제이의 일본 체류 시절 음으로 양으로 많이 도와주어 한국 정보기관의 집중 감시 대상이었다. 디제이는 귀국 후 정치적 고비 때마다 그에게 자문했다고 한다. 어느 날 야스에는 나에게 87년의 양김 분열과 관련해 이런 얘기를 했다. 당시 정세로 볼 때 디제이가 양보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간곡하게 의견을 전달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디제이도 생전에 이 문제와 관련해 자신이 더 부당하게 공격을 받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야스에, 디제이 모두 이제는 고인이 됐다.
김효순 대기자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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