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조선’과 ‘대한민국’ 사이 / 신기섭

등록 2009-09-10 21:50

신기섭  논설위원
신기섭 논설위원
‘미국’ 국적의 젊은 가수가 몇년 전 ‘한국’이 싫다고 말한 사실이 드러나 말썽이 됐다. 결국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논란은 쉬이 그치지 않는다. 얼마 전에도 독일 여성의 글이 논란이 되는 등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엇비슷한 사건이 터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특정 세대나 집단의 감정적 대응으로 치부하고 싶어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남의 일’로만 여기기 어렵다.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어떤 의식 또는 정서와 맞닿아 있다고 본다. ‘우리 안’의 그것을 조선 시대의 국가(또는 민족) 의식에 비춰 보면, 좀더 객관화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조선 후기 학자 홍양호가 쓴 <해동명장전>에는 여진족 출신 장군 이지란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으로 평가되는 그는 1371년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했다. 얼마 뒤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 이성계는 그를 신임해 자신의 처조카딸과 결혼시켰다. 이지란이 어머니 상을 당한 와중에도 그를 불러 자신의 동족인 여진족과 싸우게 할 정도로 그를 높이 샀다. 그에 대한 존경은 당대에 그치지 않았다. 그가 숨진 지 400년이 지난 뒤인 순조 때에 임금이 예관을 보내어 그의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을 정도다. 그런데 묘하게도 많은 현대 역사학자는 그를 모른 체한다.

<한국 문학에 나타난 외국의 의미>라는 책을 펴낸 미국 학자 존 프랭클(연세대 교수)은 이지란이 특별한 경우만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세종 때 인물인 은아리라는 여진 사람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조정의 조회 때, 한 벼슬아치가 은아리의 출신을 거론하며 농담을 했다가 대사헌에게 혼이 났다. 세종도 “네가 대신에게 무례하게 굴었으니 법으로 마땅히 죄주어야 할 것이로되 우선 용서하는 것이니 뒤에는 그러지 말라”고 꾸짖었다. 이 사건을 이야기하며 프랭클 교수는 “오늘날조차도 이와 같은, 혹은 이 수준에 버금가는 지위를 외국인에게 부여하는 국가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후대에도 사례는 여럿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다가 귀순해 동료였던 왜군에 맞서 싸운 김충선(본명 사야카)도 있고, 효종 때 ‘조선인’으로서 동족인 하멜 일행을 맞은 네덜란드 출신 박연(벨테브레이)도 있다.

조선은 흔히 폐쇄적인 ‘은둔의 나라’로 인식된다. 이런 인식과 이방인들에게 활짝 널려 있는 조선은 다른 나라처럼 느껴진다. 프랭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는 중국으로 대변되는 보편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이를 공유하는가가 한국 사회의 구성원, 더 나아가 ‘문명 세계’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선결 요건이었다.” 국가의 가치에 공감하면, 피부색이나 출신지는 문제가 안 됐다는 것이다. 민족 개념이 정착한 것은 조선 말기 때라고 한다. 조선이 ‘이념의 국가’였지 ‘민족의 국가’가 아니였음을, 프랭클은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그렇다면 한국을 나쁘게 말하는 ‘외국인’에게 공격적인 요즘의 정서는 어디에 뿌리를 둔 걸까? 뿌리가 민족 감정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 열광적인 환호를 받던 저 젊은 가수는 명백히 ‘한민족’인 까닭이다. 그렇다고 조선의 ‘국가의식’과 비슷한 어떤 것에서 나온 것도 아닌 듯하다. 조선의 유교적 가치관에 대비될 어떤 가치관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있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자부심만 엿보인다. 이는 ‘민족주의’와 분명히 구별되는, ‘국가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국가주의가 위험한 것은, 보편적 가치에 뿌리를 두지 않은 ‘국가’라는 틀에 집착할 때이다. 우리는 지금 그 징후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기섭 논설위원marishi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