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논설위원
2007년 이른 봄,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를 만나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잠재적인 유력한 대선 후보로, 출마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때였다. “총장님이 가진 깃발은 무엇입니까?” 저녁 식사 도중 불쑥 던진 질문에 그는 약간 의아해했다. 부연 설명이 필요했다. 지난 역사를 보면 대통령 당선자들은 한결같이 시대정신의 과녁을 꿰뚫는 핵심 키워드를 가지고 있었다. 최초의 문민정부, 첫 여야 정권교체, 사회의 근본적 개혁 등등. 그런데 본인은 무엇을 제시할 것이냐. 이에 대해 그는 미리 준비된 답변은 아니었지만 “통합 정도가 될 것 같다”고 대답했다.
당시 사람들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던 대선 출마 문제에 대한 솔직한 심정도 털어놓았다. “본선에 나가 떨어지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예선에서 실패하면 내가 총장까지 지낸 서울대에 너무 타격을 줄 것 같아 고민이다.” 낙마 위험을 무릅쓰고 열린우리당 후보 경선에 나가기는 심적 부담감이 크다는 이야기였다.
그날 만남에서 받은 느낌은 한마디로 ‘이번 대선에 출마하기는 어렵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넘보기에는 너무 결기와 용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놓은 시대정신의 깃발 역시 유권자들의 마음을 확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런 짐작이 틀리지 않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 뒤 2년 반의 세월이 흘러 그는 총리 후보자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깃발은 중도와 통합이다. 사회가 어느 때보다 극심한 갈등과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시점에서 매우 유혹적인 깃발인 게 분명하다. 그는 총리라는 징검다리를 선택함으로써 곧바로 대선 후보로 직행하는 위험부담도 덜었다.
여담이지만, 정 후보자가 대선 출마를 고심하고 있던 무렵 그의 생가 등을 둘러본 풍수지리학자 김두규 교수(우석대)는 <묵자>(墨子)의 ‘비유’(非儒)편에 나오는 ‘군자약종 불격불명’(君子若鐘 弗擊不鳴)을 빗대 “종과 같아서 때리지 않으면 울리지 않을 형세”라고 짚고 “누가 그 종을 두드릴 것인가”라고 물었다. 요즘 흘러가는 모양새를 보니 그 종을 두드리게 된 사람은 결국 이명박 대통령인 셈이다.
정 후보자도 그 말을 의식했을까. 새 정부 출범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이 대통령이 종을 울리도록 치밀하게 준비해왔다는 느낌이 든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현 정부와 크게 각을 세워왔다고 말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그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 운용에 대해 쓴소리를 하면서도 결코 일정한 선을 넘는 법이 없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 등 이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의 이런 신중하고 치밀한 면모는 앞으로의 정치적 행보와 관련해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지나간 한국 정치의 역사를 보면 서로 성격이 다른 정치세력이나 개인의 결합의 끝은 각양각색이었다. 해피엔딩을 장식한 경우도 있고,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긴 채 결별한 예도 있다. 정치를 거꾸로 읽으면 치정이 된다는 말도 있지만, 치졸한 치정극으로 끝난 잘못된 만남도 적지 않았다. 정 후보자로서는 이제 그 출발선에 서 있는 것이다. 다만 그가 한가지 명심했으면 하는 게 있다. 이제는 남이 때릴 때만 울리는 종에 머물지 말라는 것이다. 묵자가 강조한 것도, 모름지기 군자라면 “때리면 울리고 안 때리면 울지 않는” 비겁함에서 벗어나 필요할 때 스스로 울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첫 정치적 시험대이기도 하다.
김종구 논설위원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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