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논설위원
이명박 대통령은 스스로 실용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정치구조를 바꾸는 일에 나섰다. 8·15 경축사에서 개헌과 선거제도·행정구역 개편이 필요하다는 뜻을 내비치더니, 며칠 전에는 직설적으로 ‘권력구조 문제에 한정된 개헌’이라는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했다. 이에 화답해 국회 개헌특위를 만들자거나 내년 상반기 안에 개헌을 마치겠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뿐이다. 한나라당에서도 여전히 신중론이 무성하고, 민주당은 내년 이후에나 논의하자는 입장이다. 군불을 때긴 하지만 도무지 활활 타오르지 않는다.
개헌이나 선거제도 개편이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다. 개헌이든 개편이든 절대다수의 동의나 승복이 있어야 하는데, 백이면 백, 계산과 주장이 다들 다르기 때문이다. 개헌이 특히 어렵다. 우리 헌법을 개정하려면 일반 법률보다 훨씬 어려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개헌안은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나 대통령이 발의할 수 있지만, 확정되려면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하고 국민투표까지 통과해야 한다. 오늘 현재 재적이 291석이니, 한나라당 167석만으론 국회 의결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당내 의견이 갈리면 발의조차 힘들다. 혼자 개헌하겠다는 것은 헛구호인 셈이다.
불신은 더 큰 장애물이다. 한나라당 친이명박 그룹이 선호한다는 분권형 대통령제는 대통령 권력의 축소가 핵심이다. 반면, 유력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 쪽은 더 강력한 4년 중임 대통령제를 주장한다. 그를 중심으로 보면, 견제와 저항이다. 서로 믿지 않는 형국이니, 의견을 모으기 쉽지 않다. 3당 합당 때의 내각제 합의 등 그동안의 개헌론이 다 무산된 것도 그때의 강력한 대권주자가 환경 변화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당의 불신은 또 다르다. 지금의 개헌론을 국면전환용으로 본다. 개헌론으로 다른 모든 쟁점을 빨아들여 정치권의 손발을 묶고, 선거까지 정권 평가 대신 개헌 찬반으로 몰아가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근거가 전혀 없는 걱정도 아니다. 지난 2007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지금의 ‘제한적 개헌론’과 똑 닮은 ‘원포인트 개헌론’을 제기했을 때, 한나라당은 ‘판을 흔들려는 의도 아니냐’며 거부했다. 그런 의심은 이제 고스란히 되돌려진다.
국민 다수에게 개헌이나 선거제도 개편이 절실한 문제인 것 같지도 않다. 1987년의 제9차 개정 헌법이 20년 넘게 유지돼 온 것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국민 절대다수의 열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런 폭넓은 공감과 합의가 없다. 오히려 ‘국회의원들에게 힘이 더 간다고 좋아질까?’ 또는 ‘대통령을 4년 더 한다고 해서 일을 더 잘할까?’라고 반문할 사람이 더 많을 성싶다. 경제문제가 급한 다수 국민에게 개헌론 따위는 ‘정치권만의 일’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개헌론은 애초 될 일이 아니다. 논의가 없을 수야 없겠지만, 지금대로라면 말만 무성하다 흐지부지될 공산이 크다. 대통령이 실없는 사람 되기 딱 알맞게 된 것이다. 이미 그런 전례도 있다.
그러니 정략적 목적이었다면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낫다. 그게 아니라 정녕 국가발전을 위한 신념에서 나온 것이라면 발상부터 바꿔야 한다. 타협과 양보는 당연히 기본이다. 올해 말이니 내년 6월이니 하며 공기(工期) 단축을 서두를 게 아니라, 시간을 두고 두루 의견을 모으겠다는 자세여야 한다. 지금 헌법이 장수한 데는 그만한 미덕이 있기 때문이고, 이왕 어렵게 고친다면 제대로 보완하는 게 옳다. 어떻게 이 대통령은 나라 틀 다듬는 일까지 한겨울 도로공사 하듯 하려고 하는가. 여현호 논설위원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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