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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하토야마 ‘쓰나미’ / 오태규

등록 2009-09-21 21:12

오태규  논설위원
오태규 논설위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쓰나미이고, 피 없는 혁명이다.

선거혁명을 통해 탄생한 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 새 정권이 지난주 공식 출범했다. 하지만 시민의 반응은 ‘쿨’하다. 박수갈채도 열광의 함성도 없다. 일본의 대표 작가 무라카미 류가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대로, 일본 사람이 이번 선거를 통해 갑자기 어른이 됐기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무심코 저질러 놓은 일의 엄청남에 놀란 나머지 반응 신경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장례식에서 애써 울음을 참음으로써 더욱 큰 슬픔을 표현하듯이, 기쁨을 억누름으로써 기쁨을 배가하려는 일본인 특유의 ‘참음의 미학’일는지도 모른다.

하토야마 정권의 탄생은 일본 근현대사에서 시민의 힘으로 역사를 만들어낸 최초의 사건이다. 하토야마 내각 출범 다음날 <아사히신문> 사설이 표현한 것처럼, 후쿠자와 유키치가 1879년 <민정일신>이란 저서에서 ‘개진’과 ‘수구’ 두 파가 번갈아가며 정권을 잡는 영국의 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한 꿈이 비로소 130년 만에 첫발을 내딛는 의미를 지닌 대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일본은 그동안 근대화도 선진화도 민주화도 모두 위로부터 받았다. 사무라이가, 엘리트 관료가, 맥아더 장군이 던져주고, 시민은 그들이 만들어 준 매뉴얼에 맞춰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다행히 한동안 윗사람들이 방향을 잘 잡고 이끌어와, 시민도 큰 불만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소리 없이 투표장으로 몰려가 54년이나 상전 노릇을 하던 자민당을 순식간에 풍비박산 냈다. 예전처럼 먹을 것, 입을 것, 잘 것을 보장해 주지도 못하면서, 여전히 하인을 졸로 보는 상전을 내쫓은 것이다. 이런 상황이 온 데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탓이 가장 크다. 그는 개혁이란 명분 아래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면 도입해, 그나마 안정상태에 있던 일본의 사회, 회사, 마을, 가족을 갈가리 찢어놨다. 이 틈을 비집고, 생활 중시를 전면에 내세운 하토야마의 민주당이 낙담한 시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토야마 정권의 출범을 계기로, 일본 사회의 중심추가 관에서 민으로 넘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고 민생 중시 정책이 밀려오고 있다. 외교정책의 중심을 미국에서 아시아 쪽으로 옮기는 발걸음 소리가 나라 안팎에서 들려온다. 한마디로, 자민당 정권 시절 일본을 지배해온 거의 모든 가치와 구조를 뒤엎는 초강력급의 하토야마 쓰나미가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쓰나미는 진원지가 국민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쉽게 소멸할 것 같지도 않다. 하토야마 총리가 취임 뒤 열린 첫 기자회견의 모두연설에서 ‘국민 여러분’이란 표현을 무려 15차례나 사용한 것만 봐도 이번 쓰나미의 강도가 얼마나 센지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선거의 승리자는 국민 여러분이고, 그 국민 여러분의 승리를 진짜로 만들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하게 국민 여러분을 위한 정치를 해 나가겠습니다.” 마치 에이브러햄 링컨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를 연상시키는 이 문장에서, 유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일본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겠다는 하토야마 총리의 강고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하토야마 쓰나미는, 영화 <해운대>에서 우리나라에 파멸적 타격을 준 그런 악성 파도가 결코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격랑 속에서 나도 살고 너도 살리는 ‘우애’의 물결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니, 일본에서 전후 최초로 이웃 나라에 호의적인 정권이 탄생한 만큼, 그것을 우애의 쓰나미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오태규 논설위원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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