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홍세화칼럼] 한가위 단상

등록 2009-10-04 20:28수정 2018-05-11 16:05

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 기획위원
그것은 스스로 돌이켜봐도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줄곧 자랐는데 외국 땅에서 한가위나 설날을 맞았을 때 다가온 한국의 정경은 서울이 아니라 선산이 있는 산골 마을이었다. 어린 시절 기껏해야 일년에 한두 번 명절 때 아버지 따라 찾아갔을 뿐인 산골 마을의 모습이 정겹게 다가오곤 했다. 마침내 오랜 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즈음 한 프랑스 친구가 “기어이 돌아가려는가?”라고 물었을 때에도 내 대답은 “우리들의 땅이 나를 부른다”였다.

인간의 귀소본능, 거기에는 원초적 평등이 있다. 온갖 경쟁과 차별, 억압과 착취로 시끄러운 세상이지만 그 무엇도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숙명을 바꾸지 못한다. 우리의 귀소본능에는 어쩌면 누군가와 비교경쟁하는 관계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기억되는 땅에 스스로 안기고자 함이 있는 게 아닐까? 명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도 땅을 떠나면서 잃어버렸던 인간 정서를 땅을 매개로 잠시나마 공감하는 데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귀성열차에 몸을 싣거나 교통체증을 무릅쓰는 것도 잠시나마 비교경쟁의 아수라에서 벗어난 관계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적어도 명절날 고향 땅에서만큼은 대도시에 나가 성공한 사람의 우쭐거림도 변변치 못한 사람의 초라함도 노골적으로 드러나선 안 된다. 이것은 잘나가는 동창생들만 모인다는 동창회와 분명히 다른 점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러나 우리들의 땅은 맹렬한 속도로 부동산이 되고 있다. 땅이 우리 모두의 정서의 고향이 아닌, 투기 대상의 사적 소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밀어붙이는 ‘4대강 사업’이란 자자손손 물려받은 강마저 부동산으로 만들겠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니라 후손에게서 빌린 것이다.” 생텍쥐페리가 남긴 이 말은 우리가 동시대인을 착취하는 데 멈추지 않고 후손의 몫까지 빼앗고 있는 게 아닌지 묻게 하는데, 바로 우리가 그런 탐욕 사회로 치닫고 있지 않은가. 오만과 탐욕의 덩어리가 아니라면,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온전히 물려주었듯 우리 또한 후손에게 온전히 물려주어야 할 강을, 그 긴 세월 동안 면면히 흐른 강을 단시간에 결정하여 단시간에 분탕질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비교라는 단어는 비교경쟁의 의미만 남았고 비교성숙의 의미는 사라지고 있다. 남과 성적을 비교하고, 대학 간판, 명함, 재산으로 비교하는,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말한 ‘소유’로 남과 비교경쟁할 뿐, 어제보다 더 성숙한 오늘의 존재, 오늘보다 더 성숙한 내일의 관계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비교경쟁에만 익숙해짐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조차 내가 아닌 남에게서 비롯된다. 이 점은 유명 연예인을 선망하는 청소년들만의 일이 아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더불어 뛰놀게 하기는커녕 일제고사의 늪에 집어넣어 끝없이 남과 비교경쟁하도록 강요하는 상황이라면,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비교성숙은 더욱 사라지고 비교경쟁만 강력하게 남을 것이다.

남과 비교경쟁하더라도 때때로 땅의 품에서 함께 어우러지도록 남겨진 고향마저 앞으로 물질과 비교경쟁의 공간이 될 것인가.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연을 마음껏 유린하면서도 그 잘못을 성찰하지 못할 만큼 성숙의 의미를 상실한 사회, 더는 고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귀소본능은 무슨 의미로 남을까? 우리에게 되돌아가 마땅한 인간의 모습은 오로지 오만과 탐욕의 덩어리인가. 4대강 사업이 말해주듯이.

홍세화 기획위원hongsh@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