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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배순훈 관장 전 상서 / 노형석

등록 2009-10-08 20:46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배 관장님, 지난달 29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심포지엄 때 처음 뵈었지요. 서울 소격동 옛 기무사 본관의 국립미술관 재활용 안을 놓고 당신께서 수장을 맡은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건축가협회(건협)가 함께 마련한 심포지엄은 여러모로 유익했습니다. 엇갈리는 주장들을 신중하게 경청하시던 모습이 눈에 남았습니다.

미술관 용역을 받은 건협 연구진들이 그날 공개한 옛 기무사 본관, 곧 1920~30년대 건립된 경성의전 부속 의원의 도면과 옛 사진 등의 사료 분석 결과는 당혹스러웠습니다. 원래 도면을 보니 본관은 옆으로 미끈하게 뻗은 수평축 건물에 건물 앞뒤로 둥글게 튀어나온 두 계단실의 수직축이 조화를 이룬 미니멀한 건물이더군요. 세간에 10·26 정변, 12·12 쿠데타의 암울한 기억이 서린 콘크리트 흉물로 여겨졌던 건물인데, 제대로 알고 보니 20세기 초 모더니즘 건축을 탁월하게 반영한 국내 근대건축물의 걸작이었던 겁니다. 지난달 <한겨레> 인터뷰에서 관장님이 본관의 가치가 의심된다며 밝힌 전면 신축 구상은 당장 쟁점이 될 수밖에요.

참석한 건축학자들로부터 사적 지정과 미술관 백지화, 터 양보, 미술관의 용산 미군기지 터 이전 등의 날 선 주장이 나왔고, 우리 숙원을 무시하지 말라는 미술계 반론도 이어졌습니다. 덕수궁 석조전의 근대미술관 활용을 놓고 수년간 감정 섞인 격론을 벌인 전례가 있지만, 이번에도 양쪽이 역지사지하려는 분위기는 아니더군요. 건축계는 미술계가 기무사 터를 한풀이 무대로만 생각한다는 선입관이, 미술계는 건축인들이 딴죽을 거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낌새였습니다. 서구 근대 모더니즘 건축은 장식을 배격하고 철저히 공간에 몰입합니다. 순수 공간이라는 인문적 이상과 자본주의의 소비적 효율성에 철저히 따른 건축입니다. 경성의전 병원을 구상한 사람은 4대 총독부 의원장인 사이토라는 일본 의사인데, 그 발상이 놀랍더군요. “공무원이 일 보는 장소는 판잣집도 되지만, 환자를 다루는 장소는 기능에 완전히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모더니즘 도입을 관철시킨 겁니다. 유럽과 일본 곳곳의 근대건축물들을 사전 조사한 기록까지 남아 있습니다. ‘형태는 곧 기능을 따른다’는 모더니즘 건축의 철칙을 충분히 납득했던 셈입니다. 명저 <건축이야기>를 지은 패트릭 넛겐스는 “건축물에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왜 설계자가 그런 선택을 했는가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서울 북촌의 문화적 랜드마크가 될 시설이 들어설 건물인 만큼, 애초 건축가가 선택한 양식적 가치는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현관 기둥이 각기 다른 양식인 기무사 본관 입구에서 12·12 쿠데타 주역들이 찍은 기념사진을 다시 보면서, 새삼 근대사와 뒤엉킨 이 건물의 내력에 전율하게 됩니다.

관장님은 취임 초 한 인터뷰에서 기무사 본관을 세계적 미술관으로 키우기 위해 500만 관객이 올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했더군요. 미술관 문제는 미술사적 지식이나 예술적 능력으로는 못 푼다고 단언했지요. 하지만 심포지엄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건물의 문화사적 가치가 확인된 이상 문화적 고려 없이 신축을 강행한다면 저항과 역풍을 맞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다행히 이 건물은 등록문화재여서 재활용을 위한 현상 변경이 가능합니다. 지난달 국내외 현대미술가들의 ‘아트인플랫폼’ 전시를 통해 첨단 미디어 전시가 어울릴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주었습니다. 기무사 본관은 서로 윈윈하는 재활용의 획기적인 선례로 등극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합니다. 그 전제는 바로 효율이 아닌 상상력의 소통일 것입니다.

노형석 대중문화팀장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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