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형복 연세-SERI EU센터 객원자문위원
미국의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유러피언 드림-아메리칸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라는 책에서 ‘유럽합중국’의 등장을 예고했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성공이란 주로 물질적인 부를 의미한다”며 개인의 물질적 출세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리스크, 다양성, 상호의존성이 증가하는 세계에 걸맞은 더 넓은 사회복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며 그 한계를 지적한다. 그 대안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세계화 시대의 교차 지점에 위치하며, 두 시대 사이의 간극을 이어주는 가교” 구실을 하는 ‘유러피언 드림’에 주목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1946년 9월12일, 영국의 총리이던 처칠은 취리히에서 행한 연설에서 ‘유럽의 미국’을 주창하여 미연방제를 모델로 한 유럽의 지역통합을 역설하였다. 그의 주장은 전후 피폐해진 유럽의 정치와 경제의 통합을 열망하던 유럽의 지식인·정치인들과 시민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유럽 지역통합이 본격 시작되었다. 리프킨이 말한 유러피언 드림의 모태가 된 유럽경제공동체(EEC·1958년)가 발족한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난 지금, 유럽연합은 27개 회원국을 거느린 세계 최대의 경제실체가 되었다.
지난 8월30일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민주당을 이끌었으며, 새로운 총리로 취임한 하토야마는 ‘아시아의 미국’ 건설이라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그가 말하는 ‘아시아의 미국’의 실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향후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 간 협력에 바탕을 둔 국제협력 관계, 일종의 ‘아시아 중심주의’를 모색하겠다는 취지로 이해될 뿐 그가 유럽연합과 같은 ‘(동)아시아공동체’의 건설을 ‘꿈’꾸고 있는지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하토야마가 제안한 ‘아시아의 미국’은 실현 가능할까.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본인의 역사의식의 대전환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하토야마의 제안이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 거부감 없이 수용되려면 하토야마는 ‘일본 총리의 자격’으로 2차 세계대전의 전쟁책임에 대해 사과하고, 그 피해자들에게 금전적 배상을 포함한 국가 차원의 조처를 취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전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70년 폴란드의 전쟁희생자 위령탑을 방문한 브란트는 탑 앞 땅에 무릎을 꿇고 가슴에서 우러나는 눈물을 흘렸다. 이런 태도는 현 총리에게 이어져 지난 9월1일 폴란드를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은 다시 한번 폴란드인들에게 사과하였다.
전후 프랑스의 화해의 포용에 대해 독일은 ‘나치 청산’이라는 현실적 정책의 실시와 전쟁책임에 대한 사과와 배상이라는 선물로 화답하였다. 그리하여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유럽통합의 주도국으로, 또 세계 주요 무역대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보편적 지지를 얻지 못한 본질적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 ‘아시아의 미국’을 꿈꾼다면 하토야마는 지금이라도 전세계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전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는 사과를 해야 한다. 그때부터 ‘아시아의 미국’이라는 아시아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채형복 연세-SERI EU센터 객원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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