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형철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한국방송(KBS)이 최근 수신료 인상을 다시 시도하고 있는데 여론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듯하다. 수신료 인상은 정연주 전 사장 재직 당시부터 시도된 것으로 당시 진보 단체 등 시민사회는 대체로 수신료 인상의 불가피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보도 공정성’ 등을 요구하며 반대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지금 한나라당은 물론 진보적 시민단체들조차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는 분위기다. 보수 진영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진보 진영은 “이 정권이 파괴해버린 공영방송의 시스템을 복구하고 정상화시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집권 후 ‘공정성’ 전제조건을 내세우지 않는 것과 진보 진영이 ‘표피적 중계 보도 태도’를 문제 삼는 것을 보면 한국방송의 보도 경향이 바뀐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연주 사장을 강제로 몰아낸 뒤 내세운 이병순 사장 체제하의 한국방송은 확연히 과거로 돌아간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뉴스 보도는 이 사장이 주창했다는 대로 “본질보다는 현상”에 치중하고 있으며 시사보도 프로그램은 속속 폐지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시청자 조사자료 등 전문적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예능 프로그램 인기 사회자를 갑자기 하차시켜 정치적 의도가 의심되는 주먹구구식 프로그램 운영의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당시 한국방송 중계차는 덕수궁 대한문 앞 등 취재현장에서 시민들에게 쫓겨나고 기자들은 취재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기자들이 시민들의 외면을 당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실제로 각종 조사를 보면 이 사장 취임 후 한국방송의 신뢰도와 뉴스 시청률은 동반 하락했다. 구조적인 사회문제를 조명하지 못하고 현상 중계만 하며 신뢰도가 낮은 공영방송이라면 수신료는 차치하고 존재 자체에 의문이 갈 수밖에 없다. 공영방송이 일반적 속성인 진보적 가치를 버리고 보수화해버린 현 상황에서 진보 시민단체 등이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만도 하다. 그러나 좀더 큰 틀에서는 이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당장은 퇴행하는 것 같지만 긴 안목으로는 사영방송 시장이 팽창하는 현실에서 한국방송만큼은 건실한 방송문화와 공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핵심적인 방편으로 남을 것을 기대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제작진이 충분한 제작비로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이들이 다시 미래의 후배들에게 탁월한 제작능력을 전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경영진의 공영방송 철학에 문제가 있고 이 때문에 제작진의 운신의 폭이 좁아졌어도 젊은 기자와 피디, 카메라맨, 기술감독만큼은 제작 능력을 키우며 미래를 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공영방송은 수신료 등 충분하고도 건실한 재원으로 사영방송과 구별되는 양질의 프로그램을 서비스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구이다. 보도에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제작비마저 압박을 당하면 한국방송의 방송인들은 사영방송보다 못한 ‘2류’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일부에서는 이번 수신료 인상 시도가 ‘종합편성채널의 광고시장 넓혀주기’니 ‘이병순 사장 연임용’이니 하며 의혹을 제기하지만 수신료를 올려주어야 할 당위성은 이런 의혹에 앞선다. 신군부가 강제적 언론통폐합을 통해 ‘땡전 뉴스’를 만들어냈지만 세월은 흘러 쿠데타 세력은 사라지고 공영방송 체제는 남게 된 역설을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강형철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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