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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효순칼럼] 값이 다른 징용자와 미군 유골

등록 2009-11-01 21:22

김효순 대기자
김효순 대기자
지난주 목요일 오후 서울과 도쿄에서 중요한 판결이 내려졌다. 성격이 전혀 다른 법률적 다툼이지만 공교롭게도 날이 겹쳤다. 하나는 헌법재판소의 언론관련법 결정이고 또 하나는 일제 통치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요구에 대한 도쿄 고등법원의 선고이다. 둘 다 기각됐다. 결정문이나 판결문에는 법 전문가들 나름의 논리가 펼쳐져 있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투성이다. 양식과 법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하는 듯하다.

사법부 과거 청산의 길이 요원하다는 점에서는 두 나라가 마찬가지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진주한 연합군사령부는 한때 군국주의자들을 일소한다며 구체제 인물들의 공직 추방을 대대적으로 벌였지만 법관들은 별로 손대지 않았다. 일본 사법부가 아시아인들의 피해보상 요구에 철저히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이런 연원이 있다. 우리 사법부도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갖은 오욕을 겪었지만 스스로 부끄러움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것이 법관들의 의식이나 판단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재한 군인군속 재판’으로 불리던 도쿄 재판의 2심 선고가 언론의 조명을 받지 못한 것은 더욱 아쉬운 대목이다. <한겨레>를 제외한 매체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그저 당한 사람만 억울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2001년 6월 태평양전쟁 피해자들이 도쿄 지방법원에 제소해 시작된 이 소송은 전후보상 재판의 총결산이라고 일컬을 만큼 다양한 피해자들이 참가했다. 징병·징용 피해자, 유골은 돌아오지 않은 채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멋대로 합사된 사람들의 유족, 일제 때 포로감시원으로 끌려갔다가 전후 포로학대 혐의로 연합군의 군사재판에 회부돼 처형됐거나 장기투옥된 이른바 비·시(B·C)급 전범들이다. 2003년에는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도 원고단에 합류했다. 일제 때 관동군으로 징집됐다가 종전 때 소련군 포로로 끌려가 3~4년씩 동토에서 생고생을 했던 사람들이다. 군대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제외하고는 일제 피해자들이 망라돼 있는 셈이다. 일본인 후원자들의 헌신적 성원에도 불구하고 2006년에 나온 1심 판결은 전면 기각이었다.

2심 선고 전날 80대 후반의 고령인 시베리아 억류자를 포함한 원고 대표들이 도쿄로 갔다. 정권 교체로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했겠지만 여지없이 짓밟혔다.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는 일본 사법부의 ‘양심’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상고를 한다고 하지만 최고재판소에서 다른 판결이 나오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이제 남은 길은 새 민주당 정권을 압박해서 정치적 해결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민주당은 야당 시절에 비·시급 전범, 군대위안부, 시베리아 억류자 보상 등에 관한 보상법안을 의회에 여러 차례 제출한 적이 있다. 집권당이 됐다고 변심하는 것을 막으려면 이런 문제들이 당사자나 유족들에게는 생생한 상처로 남아 있다는 것을 계속 상기시키는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일본 언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아픔이 우리 사회에서 관심사로 공유돼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보수언론은 외국에 파병돼 전투 중 숨진 병사의 유골을 찾아내려는 미국 정부의 노력은 틈만 나면 부각시킨다. 그 성의에 눈물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이역 땅에서 한 많은 생을 거둔 수많은 일제 피해자들의 유골 행방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정부 정책에서도 유골을 반드시 찾아오겠다는 의지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상처를 보듬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노력이 없으면 일제의 조선 강제병합 백년을 맞이해도 근원적 화해는 어렵다.

김효순 대기자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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