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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계의창] 베를린 장벽과 잘못된 국경일 / 홀거 하이데

등록 2009-11-08 23:31

홀거 하이데  독일 사회경제행위연구소 소장
홀거 하이데 독일 사회경제행위연구소 소장
10월3일이 독일의 국경일이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다. 1990년 분단의 공식 종료를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나 통일은 기나긴 일련의 사건들의 마지막 단계일 뿐, 이를 대체할 만한 수많은 다른 날들이 있다. 1989년 11월9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는 어떤가? 또는 더 거슬러올라 그해 10월9일 옛 동독지역의 라이프치히에서 7만명이 자유와 민주개혁을 요구하며 벌인 비폭력 촛불시위도 있다.

애초엔 여러 대안들이 폭넓게 논의됐다. 의회와 정부의 최종 선택은 논리적인 한편으로 속내가 들여다보인다. 베를린 장벽의 극적인 붕괴는 대중의 행동에 의한 결과였던 반면, 1년 뒤 ‘통일의 날’은 한밤중에 의사당 건물 앞에서 독일 국기 게양식으로 시작됐고, 낮시간의 축하 군중도 정부가 동원했다. 모든 권력이 두려워하게 마련인 대중운동이 권력의 논리로 변형된 것이다.

독일 통일을 이끈 저항 운동은 애초엔 결코 민족주의적이지 않았다. 열악한 물자 공급과 극심한 여행 제한, 무소불위의 슈타지(비밀경찰) 등을 견디지 못하는 동독인들이 늘어났다. 헝가리, 체코, 폴란드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서방으로 탈출한 것은 동독에서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포기이자 더는 참을 수 없다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자본주의 도입이나 독일 통일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불법적’인 저항 세력은 당국의 감시를 피해 몰래 뒷방에서 만나야 했다. 드문 예외지만, 교회들이 어느 정도 피신처가 될 수 있었다.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는 이미 1980년대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5시 ‘평화 기도회’로 특히 유명해졌다. 초반의 설교와 대화들은 주로 동·서독 간의 평화(사실은 동독 내부의 평화)를 강조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동독의 상황이 암울해질수록 다루는 주제도 넓어졌다. 문제는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가 아니었다. 동독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이들은 대량 탈주가 개혁의 가능성을 악화시킬 것이란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평화 기도는 저항의 내용과 형식을 띠게 됐다.

1980년대 말 사회주의권은 이미 해체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소련에선 그것을 ‘페레스트로이카’라 했고, 헝가리는 1989년 봄 국경 봉쇄를 풀었으며, 폴란드와 체코는 체제를 자유화했다. 오직 동독의 지도자들만이 강압 정치를 시도하고 있었다.

1989년 10월9일은 다시 월요일이었다. 니콜라이 교회도 평화 기도회를 위해 열려 있었다. 동독 권력의 핵심부는 모든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을 명령했다. 도시는 포위됐고, 군대와 경찰은 모두 무장했다. 병원들은 유혈 사태의 부상자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공포가 퍼져나갔다. 기도회가 끝났을 땐 7만명이 교회 밖에 모였다. 개혁 세력과 공산당 대표들 사이의 중재를 통해 마련된 ‘비폭력 선언’이 먼저 낭독됐다. 이어진 촛불시위에선 “비폭력”, “자유”, 그리고 “쏘지 마라, 우리는 인민이다” 등의 슬로건이 나왔다. 총은 한 발도 발사되지 않았다.

극도의 긴장과 공포의 상황에서, 비폭력은 집단 저항의 유일한 현실적 수단이었다. 모든 참가자들이 주변 사람들이 통제 불능의 난폭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관심을 가지고, 잠재적 선동자를 진정시키고 비상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불가결했다.

이런 평화적 촛불시위 원칙은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격분하게 만드는 대신 공포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하던 것을 성취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이 독일 역사상 최초의 비폭력 혁명이었다. 그런데 새로 지정된 국경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홀거 하이데 독일 사회경제행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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