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운 한동대 교수·헌법학
미디어법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 시중의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절차는 위법이지만 법률은 유효하다는 헌재의 결론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을 전혀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대리투표와 일사부재의 원칙 위반을 지적한 헌재의 속내를 이해한다면, 속히 국회가 미디어법의 재입법 과정에 돌입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과 총리가 세종시 문제에 올인한 마당에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집권 여당에 그런 정신이 남아 있는지 의문이다. 재입법과 관련된 야당들의 거듭된 요구를 모르쇠로 외면하면서 계파 간의 내전에 돌입한 집권세력의 모습이 볼썽사납다.
이런 교착상태를 돌파하기 위하여 헌재에 다시 한 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으면 한다. 이번에 헌재가 시민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결정을 내린 한 가지 이유는 문제를 제기한 소송의 형식이 ‘권한쟁의심판’이었기 때문이다. 권한쟁의심판의 본질을 생각할 때, 국가기관들 사이에 헌법이 정한 권력의 분계선이 제대로 준수되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미묘한 일이다. 헌재 또한 국가기관의 일종이며, 헌재의 무리한 결정은 자칫 월권 시비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절차적 위법을 지적하면서도 법률의 유효성을 부인하지 못한 헌재의 용기 없는 결론은 이 점에서 합리적 변명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헌법소원의 형식으로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헌재에 기본권 침해를 주장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이번 결정에서 헌재는 대리투표의 존재와 일사부재의 원칙의 위반을 들어 입법 절차에 위법한 권한 침해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권한쟁의심판에서 이것은 국회의원들의 심의표결권한의 침해에 그치지만, 헌법소원에서 그것은 시민들의 정치적 기본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될 수 있다. 국회의원들의 심의표결권한은 결코 국회의원들 자신의 권한이 아니며 주권자인 국민들한테서 위임된 권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다른 국회의원(B)의 대리투표 행위에 의하여 표결권한을 침해당한 국회의원(A)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18대 총선에 참여하여 그 국회의원(A)을 선출한 지역구 유권자들에게 이 사태는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선거를 통해 자신들이 선출한 대표(A)에게 위임한 입법 절차에서의 표결권한을 다른 사람(B)에게 도둑맞은 꼴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특정 지역구(또는 정당)를 대표하여 심의표결에 참여할 국회의원(A)을 선출한 당해 지역구 유권자(또는 정당투표자)들의 정치적 기본권에 관한 심각한 침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위헌적인 대리투표 행위, 그럼에도 국회 표결을 유효로 선언한 국회의장단의 결정에 관해서 문제의 지역구 유권자(또는 정당투표자)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들은 대리투표를 자행한 국회의원과 그럼에도 표결의 유효성을 선언한 국회에 의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당했기 때문이다.
헌법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들의 동의가 있는 경우에만 그 결과로서의 법률에 의해 시민들의 기본권이 제한될 수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기본권 제한에 있어 법률주의의 원칙은 이처럼 동의에 의한 지배, 즉 민주주의와 적법절차의 원칙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헌재가 확인한 대리투표 행위는 ‘동의에 의한 지배’라는 입법의 대원칙이 결정적으로 훼손되었음을 증명한다. 바로 이 점을 들어 자신의 정치적 기본권이 침해되었다고 주장하는 시민들이 새로운 헌법소원의 신청인들이 된다면, 이번 사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헌법소원을 통해 헌재에 재심의 기회를 부여했으면 한다.
이국운 한동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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