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헌 고려대 교수·한국사
민족문제연구소가 4389명의 친일 ‘행적’을 사실적으로 정리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어쩐 일인지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이나 일부 언론은 몹시 분노한다. 대체로 이유는, 사실이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거나 “친일이 아니다”라는 것이고 사전을 비난하는 논리는 예의 색깔론이다. 흠잡기에 집중하기도 한다. 보수우익의 새로운 역사인식을 표방한다면서 일제 지배를 긍정하고 민족운동을 폄하한 ‘대안 교과서’의 연장이다. 슬프게도 색깔론이 전부인 한국 사회의 자칭 보수는 보수의 기본 개념조차 갖고 있지 않다.
보수에게는 말 그대로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법이다. 그중 국가와 민족이 으뜸가는 가치일 것이다. 그 국가와 민족을 되찾은 8·15 해방은 거저 온 것이 아니다. 온몸을 던져 식민지 지배를 극복하려 했던 국내외 민족운동의 흐름이 국제정세와 조응하면서 다가온 것이다. 우리 힘만으로 이룩한 해방이 아니었다고 자괴할 필요는 전혀 없다. 프랑스의 해방도 자신들의 반나치 역량뿐 아니라 연합군의 승리라는 국제정세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다르다. 프랑스는 해방 후 나치 지배의 잔재를 확실하게 청산하면서 독일에 당당하고 강력하게 과거사 정리를 요구했다. 독일이 정신적으로 우월해서 과거사 정리에 일본보다 철저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일본에는 프랑스와 같은 주변 국가가 없었다는 점도 한 요인이다. 자신의 친일문제조차 정리하지 못하면서 남의 과거사를 정리하라는 요구를 대하면서 일본은 속으로 비아냥댈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대한민국 정부가 벌써 해결했어야 할 과제를 오랜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민간이 대신해서 미봉적으로나마 정리해주려는 시도인 셈이다. 정부 수립 후 기대감 속에 출발한 ‘반민특위’가 해체된 지 60년 만의 일이지만, 그때와 달리 법적 책임을 묻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지위를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명백한 친일 행적을 두고 “어쩔 수 없었다” “아니다”라는 부정으로만 일관하는 것은,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산을 다 쓰고 생명을 내던진 이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들처럼 살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모욕은 하지 말아야 도리다. 한국 보수가 내실을 갖추려면 그 출발점은 이 지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칭 보수의 결정적인 맹점은 책임의식에 기초한 리더십의 취약성에 있다. 진정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주장한다면, 모든 일에 책임이 따르게 마련인 지도자를 더는 자처해서는 안 된다. 그게 상식이고 정도다. 반대로 현재의 지위와 기득권을 유지하려면 있는 그대로를 통해 과거 정리를 하는 성숙된 보수로 바뀌어야 한다. 이들이 명확한 사실임에도 계속 부정해야만 하는 조상의 친일 멍에에서 해방된다면,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이나 지적 성숙도도 한 차원 높아질 수 있다.
과거사 정리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는 일본 사회의 전도된 역사인식은 오늘의 동북아 문제를 푸는 데 큰 장애요인이다. 이는 거꾸로 60년이 지나서도 친일청산 문제가 왜 여전히 한국에서 중요한가 하는 질문에 답이 된다. 즉 우리 내부의 친일문제 정리는 새로 거듭나야 할 보수의 자산일 뿐 아니라 일본의 과거사 정리를 압박하고, 나아가 동북아 평화에 기여하는, 실로 무게 있는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사전은 색깔론에만 의존하던 한국 보수가 생명력과 내실을 갖추고 대한민국을 풍부하게 채우는 가늠자가 된다.
정태헌 고려대 교수·한국사
정태헌 고려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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