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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효순칼럼]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들

등록 2009-11-17 21:45

김효순 대기자
김효순 대기자
내가 백암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라는 책을 처음 만난 것은 1973년이다. 당시 국사를 전공하던 대학원생 둘이 번역을 해 책을 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번역된 것이라고 했다. 완역도 아니었다. 절반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책 이름 뒤에 1이라는 숫자가 붙었다. 역자의 한 사람이 이듬해 시국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바람에 후속 작업은 중단돼 버렸다. 인맥을 통해 알음알음 팔리고 남은 책은 당시 중앙정보부에 압수돼 행방이 묘연해졌다.

한말의 지사적 언론인이자 역사가, 독립운동가인 백암의 대표작으로 흔히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거론된다. 아프다는 뜻의 통사와 피로 맺혔다는 뜻의 혈사다. 망국 과정과 처절한 독립투쟁을 서술한 것이다. 혈사는 백암이 숨지기 5년 전인 1920년 상하이에서 출판됐다. 인쇄 지역이 이역이라는 제약도 있었겠지만, 한문으로 기술한 것은 중국인들에게 조선의 전철을 밟지 말고 일제에 대한 공동 투쟁을 촉구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인 1946년 혈사의 복각본이 서울신문사 출판국에서 간행됐지만, 번역본이 70년대 이전에 나왔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다. 항일 독립투쟁의 정통을 잇고, 이승만이 임정 대통령에서 면직된 후 대통령에 오른 백암의 대표작을 해방 이후 거의 30년간 일반 국민이 쉽게 접할 수도 없었다는 현실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무렵 서울 종로 거리에 있던 일본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혈사의 일어 번역본을 봤다. 동양문고 총서의 일환으로 두 권으로 나와 있었다. 아직 우리말 완역본이 없던 시점에 일어판을 보는 심정은 착잡했다.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기에 그 많은 사학자와 출판사들은 백암의 저서를 본 척 만 척 했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들었다.

이번에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 발족한 단체다. 임 선생이 1966년 <친일문학론>이라는 책을 내고 얼마나 철저하게 보복을 당했는지는 당시 그와 교류했던 인사들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문예지를 편집했던 작가 조정래씨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그분의 비참한 모습은 친일파에게 도전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 케이스”라고 회고했다. 일본어판은 국내 출간 10년 뒤인 76년 도쿄의 고려서림에서 나왔다. 역자인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교수도 해설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다. 서울에서 책이 나왔을 때 서평도 거의 없었고 모두 입을 다물었다고 썼다. 초판을 내고 나서 한 번도 판을 더 찍지 못할 정도로 한국 사회가 냉담했다고 했다.

지난 8일 백범 묘소 앞에서 거행된 사전 발간 보고대회에서 임종국 선생의 누이동생 임경화씨를 만났다. 혹시 일본에서 인세가 오느냐고 물었더니, “오빠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없지만 국내보다는 일본에서 책이 더 팔린 것 같다”고 말했다. 이것도 참 씁쓸한 얘기다. <친일문학론>이 정말 일본에서 더 읽혔다면 우리 사회의 정신적 뿌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02년 다시 편집해 새 판을 냈으니 초판과 합쳐서 국내에서 더 팔렸을 것으로 믿고 싶다.

친일인명사전이 나오고 나서 수구세력들의 온갖 비아냥과 훈계가 쏟아지고 있다. 무슨 자격으로 돌팔매질을 하느냐에서부터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음모라는 설까지 나왔다. 그런 분들에게 임 선생이 인생 말년에 여동생에게 했다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 “마음은 텅 비우고 속은 꽉 차게 살아라. 그런데 보통 사람은 마음은 꽉 차고 속은 텅 비게 산다.”

김효순 대기자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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