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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고고학과 밥줄 / 노형석

등록 2009-11-19 21:50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은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정치가로 유명하지만, 사상 처음 과학적 발굴을 꾀한 근대 고고학의 개척자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는 1784년 버지니아의 자기 땅 옛 무덤에 트렌치(발굴 갱)를 내어 발굴 작업을 벌였다. 당시 미시시피 강 동쪽 변에 흩어져 있는 옛 무덤들과 토루들을 누가 만들었는지를 놓고 논란이 일었는데, 인디언 원주민이 아닌 가공의 백인족이 지었다는 통설이 지배적이었다. ‘왜 뚜렷한 증거도 없이 통설을 믿을까’란 의문에 휩싸였던 제퍼슨은 무덤 속 지층을 일일이 가려가며 조사한 끝에 무덤 속 옛 인골들이 인디언 조상이며 그들이 여러 시기 거듭 매장된 사실을 밝혀냈다.

과학적 조사로 물증을 찾은 그의 ‘발굴 혁명’은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인디언을 열등인으로 경시했던 편견을 깨뜨렸다. 특히 지층 순서를 파악하는 기법은 이후 진화론, 지질학 발전에 힘입어 19세기 서구에서 고고학을 학문으로 자리매김시키는 이정표가 되었다. 인류 기원이 수천년 전 시작됐다는 성서 창조론의 믿음을 깨고 문자 발명 이전에 인류의 선사 역사가 흘러왔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고고학은 인문학 가운데 가장 ‘역동적인 파워’를 내장한 학문이다. 갑자기 출몰하는 땅속 과거의 흔적들을 통해 일상과 역사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깨는 가능성 찾기야말로 고고학자의 본령이다. 물론 땅을 판다는 기술적 특성 때문에 고고학을 수단으로만 여기는 시선도 존재한다. 그래서 고고학은 여럿의 주인을 섬긴다고들 말한다. 보물찾기 등의 상업적 수단, 민족주의를 앞세운 정치적 목적 등에 동원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1960년대 이후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 고고학에서 지금 섬기는 주인은 누구일까?

4대강 사업의 문화재 발굴 조사가 시작된 즈음인 이달 초 한국고고학회가 주최한 고고학 전국대회(전북대)를 가보았다. 술집에서 삼삼오오 만난 연구자·조사원들의 뒤풀이 풍경은 음울했다.

“나랏일 아닙니까. 정부 윗분들 눈치를 봅니다. 치열하게 말이죠. 어쩌다 이런 업자가 됐는지 곰곰 생각해 봅니다.”

“학문은 정의로워야 한다고 배웠는데, 이젠 손 잘 비벼 발굴 수주 따내는 것이 지상 목표지요. 우선 밥줄이니까.”

조사의 주체인 전문발굴 기관의 직업 연구원들은 자괴감, 회한을 털어내기에 바빴다. 고고학의 본령을 무시하고 토목공사처럼 조사가 강제되고 있다는 이구동성이다. 지난해 말부터 발굴 기관들은 사업 예상 구간 지표 조사에 몰두했다. 공식 조사 기간은 올해 1~3월이었지만, 지난해 10월부터 문화재청 채근에 미리 조사한 기관들이 수두룩하다. 보상 협상도 지지부진해 올 연말까지 많아야 20여 군데만 조사를 하게 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재청이 토지사용허가서도 받지 않고 수십 건의 발굴 허가부터 무더기 남발하고, 발굴 기관들은 7~8달 전 지표조사 비용조차 못 받는 경우가 잇따른다. 그래도 밥줄 쥔 정부 쪽에 밉보일 수 없어 말은 못 하고 속앓이만 하고 있다고들 했다. 한 연구원은 “도급업자처럼 언제 당국에서 발굴 일감이 내려올지만 고대하는 처지가 됐다”고 한탄했다.

4대강 사업은 고고학계에도 학문적 퇴락을 부추기는 재앙이다. 그런데도 학계는 이런 무리수를 떳떳이 비판하고 제동을 걸 만한 자정력을 별반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2000년대 초부터 개발 열기에 편승해 70개 이상의 ‘발굴 회사’들이 난립하면서 부실 발굴 논란과 발굴 비리 수사 등 말썽이 속출했지만, 당장 이권에 매달려 자정 기회를 번번이 놓쳐버렸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여전히 ‘뒷담화’만 하고 있을 뿐이다.


노형석 대중문화팀장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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