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상복 전남대 철학과 교수
얼마 전 오랜만에 월출산엘 다녀왔다. 흐린 날씨였지만 간혹 떨어지는 비와 찬 바람 말고는 견딜 만했다. 가파른 바윗길을 타고 천황봉에 올라서니, 흐릿한 잔구름 사이로 영산강과 멀리 옹기종기 어울린 산과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항용 느끼는 것이지만 강, 산, 들, 바다, 그리고 섬들이 한데 엉켜 돌아가는 우리네 풍토가 더없이 고맙고 아름답기만 했다. 아직 멀었는데도 산동백꽃이 곳곳에 피어 있어 정취가 한결 그윽했다. 2월쯤 피어나던 동백꽃이 웬일로 때아닌 시기에 피었단 말인가. 얼마 전에는 산자락 한켠에 철쭉꽃과 개나리꽃도 몇 송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계절이 정녕 변질되고 있는 징후인가.
우리는 종종 우리네 자연자원이 빈약하고 부족하다는 볼멘소리를 들어왔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빈곤한 지하자원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내게 그것은 믿기지 않는 말이 되고 말았다. 산길을 걷다 보면 무수히 피어나는 야생의 꽃들, 그대로 뜯어 먹어도 좋을 산채들, 그냥 따먹고 싶은 산과일들 등등, 우리네 사계절을 따라 흙, 바람, 물이 빚어놓은 자연의 혜택일 것이다. 이 풍요를 두고 어찌 자연자원의 빈곤이고 부족이라고만 탓할 수 있겠는가. 바닷가 갈대숲과 뻘밭을 거닐며 이름도 모를 무수한 게들과 장난을 치며 노니는 짱뚱어들의 휘둥그런 눈동자와 눈웃음을 한 번만이라도 마주쳐 본 사람이라면 자연자원의 부족을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을 터이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경고를 듣게 된 것은 19세기 전반의 일이다. 산업혁명과 거대 자본의 여파로 자연이 망가져 가는 틈새를 비집고 자연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을 경고한 것이다. 꿈틀거리는 자연이 인간을 결코 가만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복수의 목소리를 오늘날은 더욱 실감하게 된다. 아침에 먹은 김치마저도 배 속에서 혹여 못 먹을 양식 새우라도 섞여든 것인지 비틀거리곤 한다. 이미 쇠고기 파동에서도 보았듯이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매양 먹거리에 대한 잠재적인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한다. 자연이 여지없이 파괴되면서 어느 것 하나 먹음직스런 먹거리란 찾아보기 힘들 만큼 불안과 공포는 점점 증대하고 있다. 자연을 떠나 우리가 컴퓨터를 뜯어 먹고 살 것인가, 아니면 쓸데없이 지껄이는 텔레비전을 삶아 먹고 살 것인가. 결국 우리네의 먹거리란 산과 들에서 혹은 강과 바다에서 베풀어주는 채소와 곡식과 해초와 물고기들을 얻어먹고 사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연이 베풀어주고 건네주는 먹거리들을 겸손하게 얻어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황폐해져만 가는 자연은 그만두고라도 시골 마을과 바닷가 어촌의 공동화는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게 그저 민망스럽기만 하다. 어쩌다 엉겁결에 바닷가 마을로 달려가 어귀에 서 있노라면 쓸쓸한 정경을 넘어 비참하기만 하다.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마음을 후려치는가 하면 왜 이토록 또다른 의미의 유배지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는가를 되뇌곤 한다. 도회지의 아파트 장벽 사이를 걸으면서 먼 거리의 희미한 어린 기억 속에서나마 강과 산을 불러 보는 것이 고작이다. 녹수와 청산이라고 했던가. 파란 강물이 푸른 산을 휘휘 감돌아 껴안고 흐르면서 어느덧 임을 못 잊어 푸른 강물이 되고 파란 산이 되어 머나먼 구만리 장강을 따라 어우러지고자 노래하던 애절한 육자배기였다. 내 정은 늬 정이오 늬 정은 내 정이라고. 허나 녹수와 청산, 그 정과 사랑이 생면부지의 깡패 불도저에 싸그리 뭉개지고 말 형편이 되었다. 에라, 이 몹쓸 인간들아!
위상복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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