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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제대로 된 노조만 있었어도 / 신기섭

등록 2009-11-26 22:57

신기섭 논설위원
신기섭 논설위원
아침햇발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20명이면 그중 14명 정도가 생리 불순에 시달렸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이게 작업 때문에 그런 거면 20명 전부가 그래야지, 6명은 괜찮으니까 이게 일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녀의 착한 목소리가 안쓰럽고 또 미안했다. <전태일 평전>이 떠올랐다. 평화시장 다락방에서 고개 한번 펴지 못하고 일하던 여공들의 고충을 조사하던 1960년대의 전태일이 떠오르며, 세상이 변했다는 이야기가 다 거짓말인가 싶었다.” 최근 한 보건학자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 노동자에 대해 쓴 글의 한 대목이다.(인터넷 뉴스 <참세상>에 실린 김승섭의 기고문 ‘당신과 내가 더 강해질 수 있도록’)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에서 1급 발암물질인 벤젠이 검출됐다는 조사 결과가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공개됐지만, 그전까지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위험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여럿이 생리 불순에 시달리면서도 함께 일하는 사람 모두가 그렇지 않으면 일 때문이 아니려니 생각할 정도였다. 학자나 활동가들도 아는 게 많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의사와 보건학자들이 모였지만, 공장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내기 힘들었다고 한다. ‘기업 비밀’이라는 높은 벽 때문에 정보 접근이 불가능한 탓이다. 그사이에도 숨지는 노동자들이 계속 늘어났다. 그 가운데는 “웨이퍼를 바구니에 담아 여러 종류의 화학물질에 차례로 담갔다가 꺼내는 세척 작업”을 했다는 황유미씨도 있다.

진실을 찾으려 애쓰는 과정에서 결성된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얼마 전 책을 한권 번역해 출판했다. <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인데, “첨단기술 발전의 ‘그늘’에 맞서, 특히 전자제품 생산에 의한 노동보건과 환경보건 문제에 맞서 투쟁하는 전세계 민중들의 역사와 경험을 최초로 한곳에 모은” 것이라고 한다. 한국어판에는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 노동자와 가족이 독자들께 드리는 글’이 덧붙여졌다.

이 글에서 황유미씨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조합이 없다보니 회사 마음대로 화학약품이나 방사선을 쓰면서도 노동자들한테는 그에 대해 교육은 잘 안 합니다. … 제대로 된 노동조합이 있었다면 내 딸 유미는 백혈병에 걸리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는 이렇게 글을 끝맺고 있다. “이 책을 보시는 분들은 모쪼록 건강한 노동조합, 투명한 노동조합, 아름다운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 1987년 이전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아름다운 노동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절박한 소망이다.

노동조합 하면 어떤 사람들은 ‘노동 귀족’이니, ‘이기주의’니 하는 말들부터 떠올릴지 모르겠다. 있으나 없으나, 나에겐 의미 없는 조직이라고 생각할 노동자들도 있을 것이다. 노조는 기업 경쟁력에 방해만 된다는 주장을 퍼뜨리는 이들도 있다. 이런 비판을 모두 인정한다 할지라도, 한 가지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 남아 있다. 반도체 공장 이야기가 보여주듯, 제대로 된 노조는 노동자의 목숨을 지켜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비단 반도체 공장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목숨 걸고 일해야만 먹고사는 노동자들이 곳곳에 있다. 일하는 사람들이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것은,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뭉쳐서 노조를 만들고 엉망인 노조는 민주화해야 한다는, 너무 당연하지만 잊혀져가고 있는 진실이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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