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도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두고 그들의 진법이 우리와 다르다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십진법을 사용하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서, 북한의 전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상황인식과 계산법부터 이해해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서방의 입장에서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나 핵실험 등은 분명히 도발이다. 그래서 서방의 눈에 비친 북한은 핵개발을 추구하면서 항상 합의된 약속을 이행하지 않거나 일방적으로 파기해온 비합리적이며 기만적인 “불량국가”이다. 끊이지 않는 북한의 거칠고 위협적인 언사가 서방의 이런 인식을 더욱 강화시킨다. 그러나 서방은 어떠한가? 서방은 북한을 공격할 의도가 없으며,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체제 안전 보장과 경제적 지원을 할 용의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은 항상 선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북핵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한 9·19 공동성명 직후 미국이 명확한 증거도 내놓지 못한 상태에서 ‘달러 위조 혐의’로 북한에 강력한 금융제재를 가해 공동성명을 무력화시킨 사실이나, 일본이 북핵 불능화 2단계 합의 이후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이유로 20만t의 대북 중유제공 약속을 위반한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일탈적 행동들은 북한에 도발의 명분을 제공하고, 북한이 서방과 다른 진법으로 서방을 대하는 데 익숙하도록 만든다. 양성철 전 주미대사는 어느 영어 기고문에서 역대 미국 행정부 대북정책의 극심한 변화에 대해 김정일이 느낄 법한 혼란을 지적한 적이 있다. 지난 20년 동안 북한의 최고 정책결정자는 줄곧 김정일이었다. 그는 미국 행정부가 바뀔 때마다 북한과 한 약속이 파기되거나, 대북정책이 거의 180도 뒤집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 관계개선을 약속한 2000년 가을의 ‘공동코뮈니케’가 2001년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자 곧장 부정되었으며, 북한은 부시 행정부에 의해 이라크, 이란과 함께 실질적인 섬멸 대상을 의미하는 ‘악의 축’으로까지 지목되었다. 지금은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서 다시 포용정책의 기조로 돌아가고 있다. 남한의 대북정책도 마찬가지다. 김정일은 노태우 정부와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한 직후, 김영삼 정부의 대결적 대북정책을 경험했다. 이어서 화해협력과 평화번영을 추구하는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접했다. 그도 이 변화에 호응하여 새로운 남북관계 구축에 관심을 보이며 정상회담 합의문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비핵 개방 3000’을 내세우며 이 합의를 사실상 부정하였다. 결국 서방이 김정일의 반칙에 분노해온 지난 20년간, 그는 거꾸로 미국과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을 어지럽게 지켜보았다는 얘기다. ‘어느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하나?’ 김정일이 느꼈을 법한 고민이다. 김정일에게 한미가 예측 불가능의 대상으로 비쳤을 수 있다는 대목이다. 그 결과 김정일은 한·미의 지도자들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 못지않게 그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 불신이 자신만의 외교적 셈법을 만들어내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미국의 보즈워스 특별대표가 곧 평양을 방문한다. 북한을 6자회담으로 다시 끌어내고, 한반도 평화를 진전시킬 중대한 사명이 그의 양어깨에 걸려 있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를 맞이해서 보즈워스와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 담당자들에게 권고하고 싶다. 일방적인 미국의 시각이 아니라 김정일의 시각, 김정일의 셈법까지 고려한 미국의 셈법을 만들어 북한과 협상하기 바란다. 그것이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푸는 실용적 기초가 될 것이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연재이종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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